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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소통/외국어

일본에서 음료 리필은 가능할까?

by 대학맛탕 2024. 4. 27.

후덥지근했던 2002년 8월의 에피소드

 

2002년. 처음으로 일본에 갔던 건 여름이었다. 

기억이 조금 희미하지만, 8월 1일부터 8월 10일까지의 10일 동안이었으니 정말 여름 한복판이었던 셈이다. 처음 가 본 도쿄의 습도는 정말 대단해서, 여기서는 자판기와 에어컨이 없이는 살 수 없겠구나 생각했다.

 

그런 날씨 속에서 야마노테선(山手線)의 번화가를 둘러보던 매일, 그 날은 이케부쿠로를 선택했다. 선샤인 시티를 걸어 돌아다닌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더위에 기선을 제압당해 롯데리아로 피신했다. 

 

급하게 콜라를 한 잔 주문하고 나온 지 1분도 안 되어 다 마셔버린 뒤, 곧장 카운터로 가서 당당하게 말했다.

 

"コーラのリピールお願いします。"

 

"콜라 리필 부탁드립니다." 를 나름대로 일본어로 말한 것이다.

내 말을 들은 아르바이트 생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대로 정적이 흘렀다.

 

묘한 공기가 흐르자 바로 옆의 매니저가 무슨 일이시냐고 물어왔고, 나는 대충 비슷한 표현으로

 

リピールしたいと思います。

하고 리필을 하고싶다고 말했다. 

 

매니저 역시 갸우뚱해 했지만, 잠시 뒤 뜻을 알아차렸는지 여기서는 리필이 불가능하다고 말해줬다.

 

'아아, 일본에서는 리필의 개념이 없구나..!' 

 

하나 크게 배웠다고 생각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세상에 일본에는 리필이 없더라구" 하는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두달 뒤 군대 가서, 이후 수많은 스몰톡에서 이야기하고 10여 년을 살았다.

 

10년 후 お代わり를 배우다

 

두 번째 일본에 간 것은 그로부터 무려 10년이 지난 뒤인 2012년이었다. 

면접을 보러 비행기를 타고 도쿄에 갔다. 그 사이 일본어 능력시험 1급도 취득했고 일본 회사로 이직해 보고자 일본어 회화 학원도 다니는 등 일본어를 잊지 않은 세월을 보냈지만, 다시 도쿄에 가는 데에 10년이 걸릴 줄은 몰랐다.

 

여행을 겸했던지라 혼자서 식사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고, 그러다보니 "물 좀 더 주세요"가 "お水のお代わりお願いします"라는 것을 배우게 됐다. 무한리필 메뉴 이용 시 더 달라고 말할 때도 お代わり(おかわり)를 쓴다는 것 또한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일본에서는 '리필' 이라는 영단어를 이런 상황에서 아예 쓰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롯데리아 가서 お代わりお願いしします하면 해 준다는 이야기도 아니니 착각하면 안 된다. )

 

2002년 영문을 몰라했던 롯데리아 점원의 표정은 '아니 공짜로 더 달라니 그런 규정은 없는데' 의 당혹스러움이 아니라, '이 사람이 말하는 게 무슨 말이지?' 라는 의문이었다. 10년 전의 그냥 잠깐 있었던 에피소드일 뿐인데 얼굴이 붉어졌다.

 

드라마나 만화에서 밥 한그릇 더 주세요! 하는 장면에서도 お代わり를 쓴다.

ご飯のお代わりお願いします。(ごはんのおかわりおねがいします)

 

종종 라멘이나 정식 식당에 갔을 때 'ご飯お代わり無料'라고 쓰여있으면 공기밥 무한리필이니 마음놓고 밥을 더 달라고 하자.

 

일본어에서의 왜래어 읽기

 

일본어를 학습한 분이라면, 내가 2002년에 말했던 것이 단어만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영단어 refill을 그대로 옮긴다면 リピール가 아니라 リフィル가 된다. (リヒル가 아닌 건 좀 더 복잡하니 일단 넘어가자.)

 

먼저 한국어에서는 p와 f를 ㅍ으로 퉁쳐버리는 경우가 많지만, 일본어에서는 f는 フ, p는 プ로 엄밀하게 구분한다. 그래서

일본어를 처음 공부할 때는 한국어에 모음이 다양해서 오십음도만 있는 일본어를 발음하는 건 어렵지 않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렇게 한국어에서 구별하는 습관이 없는 영단어를 발음할 때 주의하지 않으면 회화에서 상대방이 갸우뚱해 할 때가 생긴다.

 

 머핀 ➡ マフィン

 팬클럽 ➡ ファンクラブ

 펀드  ファンド

 

장음에도 주의해야 한다.  (왜 リピル도 아닌 リピール라고 했는지는 잘 기억이 안난다. 그냥 feel 받아서?)

가장 쉬운 규칙은 영어 모음이 2개 붙어있을 때 확실하게 장음을 빼 주는 것이다. 

 

 pool   プール

 full  フル

 feel ➡ フィール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두 트릭(?)이 섞인 이런 단어들을 말해 보면 장음을 생략하고 말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flower   フラワー   

 full power   フルパワー (フールパーワー나 フルパワ 아니다.)

    powerful     パワフル (パワフール아니다.)

 

 

그 밖에도 한국에서 정형화된 것과 전혀 다르게 발음하는 왜래어도 있다.

 

 호가든  ➡ ヒューガルデン(카타카나를 딱 보면 휴르가르덴? 하게 된다.)

    보드카   ウォッカ (어째 술 밖에 예가 떠오르지 않는다.)

 내비게이션 ➡ ナビケーション (별로 헷갈리지 않을 것 같지만 '나비~'로 발음하지 않으면 잘 전달지지 않는다.)  

 

P.S.

お代わり라는 말을 지배하지 못한 リフィル은 그럼 일본에서는 어떤 의미로 쓰일까?

 

먼저 의미 그대로 번역하면 再び詰める(ふたたびつめる, 다시 채우다)로, 알맹이를 채워서 다시 쓰는 다이어리, 연료통 등에는 リフィル가 쓰인다. 반면 반대말인 일회용은 영어를 쓰지 않고 使い捨て(つかいすて, 쓰고 버림)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