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에서 처음 들은 뜻밖의 질문
일본에 산 지 반 년도 안 되었을 즈음, 히로시마풍 오코노미야키(広島風お好み焼き) 식당에 처음 가 봤다. 히로시마 사람들은 오코노미야키에 '히로시마풍'을 붙이는 것을 싫어한다고 들었는데, 믿거나 말거나이고 이 글에서는 줄여서 히로시마야키라고 하겠다.
히로시마야키는 오코노미야키와 달리 면을 따로 철판에 볶아서 빈대떡으로 그 면을 오믈렛처럼 감싸서 만든다. 오코노미야키가 그 자체로 두꺼운 빈대떡이라면, 히로시마야키는 자르면 그 안에서 면이 우수수 쏟아지는 식감이 특징이다.
처음 먹어보는 것이기도 하고, 가게 중앙 스탠드에서 철판에 촥~ 굽는 냄새에 기대가 만발했다. 두근거리며 오징어 해물 믹스와 돼지김치 믹스를 시켰는데 점원이 한 가지를 물어왔다.
何玉にしますか。(なんたまにしますか)
식당에서 들을 단어가 아니라서 처음에는 그냥 어리둥절했다.
뭔가 커스텀하거나 취향을 물어보는 건가 대략 어림짐작해서 '普通でお願いします'(보통으로 주세요) 하고 말하니, 점원이 약간 애매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대로 돌아갔다.
메뉴판을 보았을 때 다음과 같은 문구가 써 있었겠지만(기억으로 추론한 것),
3玉まで替え玉無料!
1.5玉も注文できます。
그 당시엔 이미 주문도 들어갔겠다 뭐 그런게 있나보다 하고 그냥 넘어갔다.
하카타 라멘에서 밝혀진 구슬의 비밀
몇 달이 지나 회사 동료들과 점심시간에 하카타 라멘집을 갔다. 도쿄의 하카타(후쿠오카) 라멘은 새하얀 국물에 가는 면이 특징으로 한국에서 여행가면 많이들 먹는 이치란(一蘭)과 비슷하다. 그렇게 맛있게 먹던 도중 동료가 갑자기 카운터 쪽으로
替え玉お願いします!(かえだまおねがいします)
라고 외쳤다.
카에다마? 그게 뭐지? 갑자기 왜 구슬이야?
아예 뭔 이야기인지 모르고 지나간 지난번과 달리 이번엔 '카에다마'라는 말이 또렷하게 들렸다.
주문한 분이 카운터의 옆옆자리라 굳이 불러서 물어보기도 애매해서 그냥 있으니, 잠시 후에 뜨겁게 익힌 면을 별도의 작은 그릇에 담아내는 것이었다. 주문한 분은 먹던 국물에 면을 말아서 다시 후루룩.
그 뒤 벽에 써붙어있는 「替え玉無料」라는 문구를 보고 그제서야 지난번 히로시마야키 때의 기억이 연결되며 替え玉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추가 면 사리」였던 것이다.
면 사리를 굳이 玉라고 하는 것도 별도의 그릇에 담아낼 때 동그랗게 둘둘 말린 면의 모습을 보고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하카타 라멘은 예외없이 면이 꽤 가는 편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大盛(おおもり, 곱배기)를 주문하는 것이 아니라, 면을 즐긴 후 추가면을 주문해서 말아먹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替え玉無料 (카에다마 무료)라고 쓰여있는 곳은 면 무한리필인 셈이다.
替え玉는 '가짜로 세우는 대역'이라는 의미도 있다. 암살의 위험이 있을 때 대신 세우는 의미의 影武者(かげむしゃ)나 대신 인질이 되는 의미의 身代わり(みがわり)와는 뉘앙스가 다르고, 대리 시험을 보거나 스턴트맨을 쓸 때는 의미에 가깝다.
아무튼 그래서 나도 의기양양하게
替え玉ください!(かえだまください)
라고 외쳤다.
그러자 점원도 씩씩하게
はいー
麺の硬さはどうしますか。(めんのかたさはどうしますか)
라고 물어왔다.
질문이 또 올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던지라 조금 당황하긴 했으나,
硬さ라면 면의 딱딱함을 말하는 것이겠지 훗..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普通でお願いします。(ふつうでおねがいします)
라고 답했다.
그렇다. 알아는 들었지만 면을 얼마나 익히는지를 어떻게 말해야 할 지 몰랐던 것이다.
히로시마야키 때처럼 대화가 안 된 것은 아니지만, 내가 낸 대답은 ふつう로 같았다.
사실 식당이라면 90%는 먹히지만, 일본어 학습자로서 그것만으로는 좀 아쉬우니 관련된 표현을 좀 알아보자.
라멘집에서 면 주문하기
모든 가게에서 '면을 어떻게 해 드릴까요?' 라고 묻지는 않는다. 몇 가지 케이스를 보자.
먼저 하카타 라멘에서 면의 딱딱함을 말하는 표현은 아래의 네가지다.
①やわらかめ - 부드럽게
②ふつう - 보통
③かため - 딱딱하게
④バリカタ - 상당히 딱딱하게
⑤ハリガネ - 말도 안되게 딱딱하게
①~③은 한 방에 알기 쉽고 ⑤는 거르면 되지만 ④가 문제인데, 먹을 때 면 안의 심이 느껴질 정도로 딱딱한 정도를 뜻한다.
사실 먹다보면 자연스레 면이 국물에 풀어지기 때문에 やわらかめ를 주문하는 일은 거의 없고, 주문하는 톤에서 '내가 하카타 라멘좀 먹는다' 라는 포스를 풍기는 사람은 여지없이 バリカタ를 먹는다.
バリカタ의 ばり는 후쿠오카 사투리가 어원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80년대에 후쿠오카 지역의 남자 청소년들이 バリ를 앞에 붙여쓰던 유행어러 겁나 쩔어! 의 '겁나' 같은 의미이다. 당시에도 어른들과 여학생들은 쓰지 않다가 그대로 사어가 된 것이, 라멘집의 면 표기에 쓰여서 남았고 하카타 라멘이 도쿄에도 퍼져 여기에 이른 것이다.
한편 점포수로 가장 많을지도 모르는 요코하마 이에케(横浜家家) 라멘집에서는 식권을 내면
お好みどうしますか(おこのみどうしますか)
하고 물어온다. 직역하면 '어떤 취향으로 만들어드릴까요?' 라는 의미이지만 다음의 3항목을 골라달라는 뜻이다.
1. 麺(めん, 면)
①軟らかめ(やわらかめ) ②普通(ふつう) ③硬め(かため)
①부드럽게 ②보통 ③딱딱하게
2. 味(あじ, 국물)
①薄め(うすめ) ② 普通(ふつう) ③濃いめ(こいめ)
①연하게 ②보통 ③진하게
3. 油(あぶら, 기름)
①少なめ(すくなめ) ② 普通(ふつう) ③多め(おおめ)
①조금 ②보통 ③많이
그래서 대답할 때는 (내 취향의 기준)
面は柔らかめで、味は薄め、油は少なめでお願いします。(면은 부드럽게, 맛은 연하게, 기름은 조금으로 해주세요)
와 같이 말해도 되고
やらわかめ、うすめ、すくなめ
와 같이 하나씩 천천히 불러줘도 된다. (반말이라고 뭐라 안한다.)
물론 외우기도 귀찮고 모르겠으면
全部普通でお願いします(ぜんぶふつうでおねかいします)라고 하면 보통으로 만들어 준다.
물론 일본의 라멘집은 한국의 순대국집만큼이나 많고, 각각의 유파에 따라 주문하는 스타일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다 알고 갈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두가지만 알고 가도 70퍼센트는 커버가 될 것이다.
P.S. 그렇다면 면을 의미하는 한국어 '사리'의 어원은 무엇일까?
사리는 국수, 새끼, 실 따위를 뭉쳐 동그랗게 만든 순 우리말이다. 그러니까 면사리는 맞고 떡사리는 틀리다. 동그랗게 뭉친다는 의미의 동사 '사리다' 에서 왔다고 한다. 어원을 알고 나니 '몸을 사리다' 또한 쉽게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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