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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게임 이야기

RPG, 확률과 변수의 리얼리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5. 11. 12.
 게임이라는 문화가 생겨난 이래 가장 많이 플레이되는 장르는 무엇일까? 전 세계를 아우르자면 RPG, 액션,
스포츠겠지만 일본과 우리나라의 게이머에게 국한하여 묻는다면 보통 RPG라고 대답할 것이다. 온라인 게임
의 전세계적인 확장과 가능성을 보여준 장르 역시 RPG였다. RPG란 과연 어떻게 해서 생겨난 물건인지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 보고자 한다.

나는 중학생 시절 RPG라는 약어의 의미가 궁금해서 사전에서 Role Playing을 찾아봤을 때 '역할 연기'이라
고 나와 있었지만 그 시절 그 해석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했다. '주인공 캐릭터가 동료를 얻어 세계
를 모험하는 것','아주 드문 경우가 아닌 이상 1인용' 이 내 머릿속의 RPG의 정의였는데 역할 수행이라니 말
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내 머릿속에 확립된 RPG의 정의는 롤플레잉이라기 보다는 어드벤쳐에 가까웠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TRPG의 진행 상황을 떠올려보면 어느정도 이해가 된다. 


던전 마스터가 상황을 설명해주면 플레이어들은 각자가 작성한 캐릭터 시트에 등재된 인물들이 전투를 하고
회복을 해주는 과정에서 각각의 '역할 수행'을 해 나간다. TRPG를 할 때의 모습은 주어진 상황을 가지고 각자
가 만들어내는 연극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RPG란 본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2인 이상
의 다수가 모여야 가능한 것이였다. 그러나 전자 게임의 RPG는 '당연히' 혼자 하는 게임일 뿐만 아니라 그 시절
내가 주로 즐기던 FINAL FANTASY식으로 정형화된 일본식 RPG는 플레이어가 주인공 캐릭터와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 캐릭터의 활약상을 지켜보는 3인칭 관점을 취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RPG의 본래의 뜻과는 많
이 달라져 있었고,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사전의 뜻을 보고 의아해했던 것이다.





                  뭐 이런 분위기로 돌아가는 것이 TRPG이다. DM이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음.
                    나도 이런 Cute한 소녀들과 플레이하고 싶어~!!

 

 

 

 


                              그러나,  실상은 이런 것이다....(..)
 


그렇다면, 본래 보드 게임방에서나 플레이되어야 할 TRPG는 어떻게 전자 게임의 RPG로 거듭나서 게임 장르
의 한 축을 형성하였을까? 거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플레이 방법에 단순화시켜 보면 '변수 조절의 간편함' 이 아닐까 생각한다. TRPG에서는 공격이나 주문
의 성공 실패 등의 여러가지 변수들을 모두 주사위를 굴려 처리한다. ' 하지만 그것을 위해 동작 하나하나에 매
번 주사위를 굴리는 것은 분명 지겨운 작업이다. 이것을 간편하게 해결해 주는 것이 바로 컴퓨터이다. 컴퓨터는
혼자서 생각할 수는 없지만 인간이 정확하게 규칙을 잡아주면 그것을 빠르고 오류 없이 실행한다.
다음으로 '플레이의 접근성 상승' 을 들 수 있다. 이전까지는 'RPG의 복잡한 규칙을 알고 그것을 즐기며 시간이
있는 사람'  2명 이상 모여야만 플레이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컴퓨터로는 가볍게 혼자서 즐길 수가 있다.
그만두고 싶으면 바로 끝내면 그만이다. 사람들은 간편한 것을 추구하고, 유저는 컴퓨터의 RPG로 점점 이동한다.
또한 컴퓨터의 RPG는 역할 수행 결과를 화면으로 출력해 주는 마법까지 부릴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조악한 그림
이지만 상상에만 의존하던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이후 전자 게임의 RPG는 지속적으로 발전했고 처음 언급한 대로 가장 많이 플레이되는 장르 중 하나가 되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RPG에 열광할까? 그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현실과 비슷하다있다.
'RPG의 소재가 대부분 판타지인데 그럴 리가 있나..' 하는 반문이 들리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리얼리티
는 소재의 리얼리티가 아닌 '모든 역할 수행에서의 확률의 존재'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TRPG에서 모든 행동의 결과를 알려주는 매개체는 주사위다. 아무리 뛰어난 수학자가 평생
확률을 연구한다 해도 지금 굴릴 주사위의 결과는 '알 수 없다.' 그래서 RPG가 현실과 비슷한 것이다. 액션 게
임에서 주인공 캐릭터로 상대방을 가격하면 100% 맞는다. 그러나 RPG에서는 공격이 빗나갈 수도 있고 적이 공
격을 막아낼 수도 있다.

 

 


                                         TRPG에서 주인공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사위



수학에서 확률과 변수가 필연적인 관계인 것은 RPG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게임에 구현되어 있는 함수 관계에
따라 행동이 성립되고 거기에는 현실과 같은 확률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위해서는 변수가 필수적이다.
가령 당신이 지금 게임에서 '몬스터를 검으로 공격' 한다는 상황을 가정해 보면, 검으로의 공격이 변수이고 공
격한다는 사실이 함수 관계이며 그 행동 후의 결과는 확률에 따라 처리된다는 이야기이다.

RPG에서 플레이어에게 성취감과 재미를 주는 것이 바로 이 변수이기도 하다. 플레이어가 몬스터에게 이길 수
없었다면 지속적인 사냥을 통해 '검 공격'이라는 변수의 결과인 데미지를 증가시키고, '검 공격을 성공시킬
확률'을 높아지게 할 수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RTS의 대표적인 게임인 '스타크래프트'를 떠올려 보자.

 이 게임에는 변수만이 존재한다. 스타크래프트의 전투에서는 공격이 빗나가는 일은 없다. 플레이어는 최대한 빠른
생산을 통해 유닛 수를 늘리는 한편 지속적인 업그레이드로 공격에 대한 변수를 조절하는 것이 승리를 위한 지
름길이 된다. 플레이어의 컨트롤 실력은 플레이어 개인에게서만 파생되는 변수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내가
아무리 잘해도 지는 경우가 존재한다.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이 우리나라에서 이토록 오래 장수하는 것은 액션처럼 한가지 변수만을 가지고 싸워
쉽게 질리지 않고 그것이 체스나 장기의 형태로 더 복잡해져도 나쁠 뿐인 '적당히 즐기기 딱 좋은 적절한 변수
의 가짓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프로리그 형성 등의 외적인 이유가 더 많겠지만)




           이들에게 예외란 없다. 적의 가래탄환은 무조건 명중한다. 변수의 꼭두각시들인 것이다.




다시 RPG 쪽으로 돌아와서 이야기해 보자. 공격과 방어뿐만 아니라 복잡한 전투에서 온갖 보조 마법을 거는 것
역시 공격 성공률 및 그 결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변수 조절이다. 더구나 그 변수 조절에도 모두 확률이 적용된다.
바로 여기서 진정한 리얼리티가 발생하는 것이다. 게임 프로그램 내에서는 이렇듯 수많은 확률과 변수가 복합적
으로 처리되고 있을 뿐이지만 화면에 뿌려지는 사실적인 결과 출력을 통해 우리는 거기에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우측 상단의 수많은 보조 효과에 주목. 저것 하나하나가 결과를 달리할 수 있다.  


6편 이후의 FINAL FANTASY를 때때로 'RPG'가 아닌 '인터랙티브 무비'로 평가 절하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바
로 위에서 설명한 '리얼리티'의 부재에서 찾을 수 있다. 분명 RPG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
레벨업 이외의 변수가 그다지 많지 않다. 보스마다 약점이 정해져 있어서 그 곳을 두드리면 간단히 이길 수 있는
반면 그 외의 방법으로는 마땅히 전략이 존재하지 않는다. 플레이어의 분신이 '역할 수행'을 하는 한다기 보다는
준비되어 있는 영상에 약간의 변수를 주는 수준에 그쳐버린다. FF7 어드밴트 칠드런을 보고 난 직후 마치 'FF7
외전' 을 플레이하고 엔딩을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일까..(게임성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이토록 현실에서의 삶을 결정하는 '운'(마땅히 표현할 말이 없다.)과 같은 '주사위'(전자 게임은 프로그램)의 존
재가 바로 RPG를 현실과 비슷하게 한다. 최근에는 그 변수가 마치 현실처럼 수없이 늘어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최근의 RPG에서 가상 현실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