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글보기<<< 라면 이야기 23 - 해외판매용 김치 신라면
계속 일본 라면만 포스팅하다가 지난번 오랜만에 농심 라면을 리뷰했는데 연속 농심 라면 리뷰를 쓰게 되었다.
60주년 기념으로 농심의 사명 그대로인 '농심 라면'이 발표된 것.
한국 라면을 일본에서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나 이 정도의 신제품은 동키호테나 니쿠노 하나마사에 가도 아직 찾아볼 수 없다.
다른 라면의 나트륨량이 어느정도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엄청 짤 것 같은 1,790밀리그램의 나트륨.
오랫동안 일본 라면만 먹다보니 먼저 넣으세요 먹기 직전에 넣으세요 하는 스프의 강조문구가 많이 친숙해졌는데, 농심 라면에서 그런 기믹을 보니 신선한 느낌이다.
라면을 끓일 때 스프는 항상 끓기 전에 풀어넣어 둔다. 물이 끓은 뒤에 넣으면 스프가 증기에 휩쓸려 튀어버리기 때문이다.
면은 신라면보다 가늘고 안성탕면보다 살짝 굵은 느낌.
국물의 빛깔과 향에서 이미 진한 소고기 장국의 풍미가 느껴진다. 콩고기 건더기도 꽤 크고 실한 편.
먹기 직전에 넣으라는 비법스프 투하 완료.
라면을 먹을 때 가장 설레이는 순간.
먹어본 감상은.. 한 마디로 정리가 가능하다.
농심 쇠고기면의 완벽한 부활.
짜장면을 재현했지만 춘장이 들어가지 않은 짜파게티, 곰탕이 아니라 돈코츠 라멘 국물에 가까운 사리곰탕면이 그렇듯, 쇠고기면도 소고기 장국을 재현했지만 원본과는 다른 독자적인 맛이 있었다. 쇠기름을 베이스로 한 깊은 국물맛.
80년대 말 쇠고기면이 100원, 신라면이 200원 할 시절. 후발주자인 신라면이 독특한 맛으로 선풍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나에게는 너무 매워서 항상 쇠고기면을 먹었다. 그러다보니 쇠고기면 특유의 담백함과 얼큰함에 푹 빠져들어 신라면은 매운 맛만 돌출된, 안성탕면은 밀가루 면 맛이 너무 센 라면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어느 즈음부터 쇠고기면은 보이지 않게 되었고 '언젠가 그 라면 다시 먹고싶다' 하며 꾸준히 그리워해 왔다.
종종 비슷한 계열의 라면이 여러 라면에서 소고기면의 흔적을 대체해서 즐기곤 했다. 포장에 귀여운 너구리가 추가된 안성탕면은 면을 씹을때의 식감, 오뚜기 스낵면은 국물이 쇠고기면의 마일드 버전, 무파마는 좋은 재료를 쓴 쇠고기면 같은 느낌이었다.
나중에 농심이 아닌 다른 회사에서 쇠고기면이 나왔지만 포장이 주황색으로 달랐다. 이름만 베낀 열화판이 아닌가 생각해서 '언젠가 농심이 꼭 다시 내줬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30여년을 살아왔고, 그렇게 그리워했던 맛을 농심라면에서 만났다.
...그러나 그 기억은 일부 조작되어 있었다.
농심 쇠고기면의 패키지를 찾아 인터넷을 잔뜩 뒤졌지만 농심 쇠고기면은 나오지 않는 데에서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농심 홈페이지에 1970년에 개발된 소고기 라면이 있어서, 내가 먹던 쇠고기면이 이 소고기 라면의 패키지와 이름이 바뀐 것이 아닌가 했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82년에 발매된 해피 소고기 라면이 혹시 내가 먹던 쇠고기면이 아닌가 했으나, 패키지를 여러번 고쳐서 봐도 본 기억이 나지 않으니 이 가설도 기각.
유튜브나 인터넷을 다 뒤져도 없어서 계속 추적한 끝에 하나의 사실로 귀결되었다.
쇠고기면은 농심이 아닌 삼양 제품이었던 것이다.
나중에 삼양라면과 비슷하게 주황색 포장이 된 것을 열화판 카피캣으로 오해했던 것.
나름 라면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아온, 자칭 농노(농심의 노예)인 나의 기원과 같은 라면이 라이벌 회사 제품이었다니.. 창작물에 자주 나오는, 자신이 천대하던 종족이 실은 자신의 기원이었던 클리셰를 보는 느낌이다.
이 사실을 확인하느라 농심의 연혁을 뒤지면서 농심 라면에 대한 오해도 바로잡을 수 있었다.
사명이 아직 롯데공업이었던 1975년에 냈던 라면 이름이 '농심 라면'으로, 농심 라면이 먼저 있었고 그 이름을 따 와서 사명을 '농심'으로 변경한 것이었다.
유튜브 쪽을 찾다가 '형님 소고기 라면' 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한 번 리메이크된 적이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영상을 보니 '아 이런 라면 있었지' 하며 기억이 돌아왔다. 쇠고기면을 찾아헤맬 때의 좋은 대체재였는데 왜인지 금새 사라지고 말았다. 지난번 포스팅에서 다룬 안성탕면 김치처럼 이 라면도 농심 연혁에 실려있지 않다.
그리고 또 한번 리메이크됐다는 사실도 알았다. 다만 이 쪽은 완벽한 리메이크라기보다는 '육개장'이 뒤에 붙은 혼종.
여러모로 기억의 오류가 겹쳐 알 수 없는 글이 되어버렸지만, 아무튼 리메이크판 농심 라면은 훌륭한 퀄리티였다.
치킨스프 베이스의 일본 인스턴트 라멘이 한국의 매운 '라면'으로 갈려나올 시기의 그 기세를 확실히 느낄수 있다.
다음 라면 이야기에서는 눈앞에 있었는데도 30여년 간 찾아헤맨 그 쇠고기면 리뷰를 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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