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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인문

[책] 신화로 읽는 영화 영화로 읽는 신화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12. 27.
(책 표지는 라이프로그에..) 

 얼마 남지 않은 올해가 가면 이 책을 만난지도 어언 3년 째에 접어든다. 군제대 후 처음 맞는 봄 학기,
4년만에 돌아온 학교생활에 정신이 없고, 새로운 사랑에 설레이던 2005년 봄, 유재원 교수님의 강의와
이 책을 만났다. 2006년 봄에도 교수님의 강의를 들었지만 회사 일 때문에 출석하지 못하게 되고, 라이
프로그에 올려둔 후 언젠가 꼭 다시 한 번 읽겠다는 다짐도 한 해가 넘어가도록 지켜지지 못했다. 올해
비로소 책을 다시 구입했지만, 이번에도 다른 일에 밀려 차일피일 미뤄지곤 했다. 올해가 가기전에 꼭
읽겠다는 생각으로 지난 주 책을 집어들었는데, 3일만에 다 읽어 버렸다.

 책의 제목과 저자 서문이 그렇듯이 어떤 영화의 모티브를 들려주고, 영화를 신화적으로 해석하기 시작
하는데, 그 해석이 절묘하기 그지없다. 정말 이 영화들의 모티브가 모두 신화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물론 서양 영화의 경우에는 실제로 그런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런 절묘한 해석은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으며, 모두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넓고 깊은 저자의 신화
적 지식에 기인한다. '대부'의 비토를 제우스에, 마이클을 헤르메스의 이야기에 완전히 맞아떨어지고, '지
옥의 묵시록'에 나오는 정글의 원시제국에서는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에 나타난 원시부족의 인신
공희 행태와 그 기원을 설명한다. '잉글리쉬 페이션트'에서는 간통의 기원을, 그리고 '쉬리'에서는 사랑을
위해 조국을 배반한 그리스 신화의 아리아드네와, 조국을 위해 남자를 배반한 델릴라를 이야기하며 그 어
느쪽도 선택하지 못한 이방희의 처지를 설명한다. 

 조국이냐 아니면 사랑이냐 하는 선택은 언제나 여자의 몫이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자들에게 이런
고뇌는 없다. 여자에 대한 사랑 때문에 조국을 배반한다는 일은 남자들에게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나약
하고 비겁한 행위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첨예한 사회에서 남자의 태도는 결정
되어 있다. 그러기에 유중원은 로미오일 수 없다. 따라서 이방희 역시 줄리엣일 수 없었다. 그녀에게 남
은 길은 죽음뿐이다. 영화의 에필로그 부분에서 유중원의 음성 사서함에 남겨진 이방희의 마지막 메시
지가 나온다. 이 메시지에서 CTX폭탄이 설치되어 있는 곳과 자신이 있을 축구장의 좌석 위치를 말해
준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랑을 위해서 조국을 배반한 것이다. 그러나 그 배반은 반만의 배반이다. 그리
고 이렇게 덧붙인다. "중원씨,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다른 사람을 보내. 지난 1년이 내 삶의 전부야. 이방
희도 이명현도 아닌, 진정한 내 자신이었어. 보고 싶어" 죽음을 예감한 절망적 사랑의 고백, 이것이 저격
수 이방희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리고 이방희는 자신의 바람과는 달리 끝내 유중원의 총에 맞아 죽는다.
그녀에게 지난 1년간의 사랑은 달콤한 지옥이었다.

p. 138  '쉬리' 내용 중에서..

 신화의 해석에 끄덕끄덕하기만 하다가 쉬리 부분에서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저 재미있게 봤던 오
락영화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렇게 신화로 풀어져나올 수 있다는 데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지난 여름에
포스팅했던 페드라처럼 중간중간 모르는 영화도 좀 섞여있는 편이지만, 어느하나 버릴 것이 없는 훌륭한
해석이었고, 지루하지도 않았다. 책을 읽고 나서 영화를 다시 찾아서 볼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단순히 훌륭한 해석의 나열이라면, 지금까지 이 책을 두고두고 읽지는 않을 것이다. 저자의 다른
책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사항인데, 책의 매 챕터마다 인간의 삶과 죽음, 사랑과 같은 철학적인 주제
에 대한 고찰이 곁들여져 있고, 그 마지막에는 저자가 보내는 메시지가 있다. 그리고 그중 가장 힘이 들어가
있는 메시지는 바로 '사랑'에 관한 것이다. 
 
 이렇게 사랑 대신 불패를 택한 동방불패는 파리스보다 더 큰 불행을 맞는다. 부귀와 영화를 누려도 사랑
받지 못한다면 인생은 의미가 없다. 그런 점에서 헬레네의 사라을 선택한 파리스는 옳았다. 그리스 인들의
천재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한 남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사랑을 얻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연륜이
필요하다. 젊어서는 권력이나 재력을 얻으면 여자들의 사랑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
러나 이것은 착각일 뿐이다. 사실 돈과 지위는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서 어느 정도 이루어진다. 그러나 사
랑만은 나이를 먹을수록 멀어져 간다. 부와 권력을 한 손에 쥔 사람도 늙으면 여인의 사랑을 기대할 수 없
다. 이런 점에서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이 원하는 여인의 사랑을 얻게 해주겠다는 아프로디테의 제의를 받아
들인 파리스는 현명한 사람이다.

p.16 '동방불패' 내용 중에서..

 사랑을 할 때 우유부단함은 비극이다. 아니, 차라리 죄악이다. 전설 속의 트리스탄이 삼촌의 아내인 이졸
데와 절망적 사랑을 하듯이, 영화 속의 트르타는 동생의 약혼녀이자 형의 아내인 수잔나와 이루어질 수 없
는 사랑을 한다. 둘 다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랑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소극적 사랑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사랑에 대해서 소극적이면 단순히 사랑하는 당사자들만이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우유
부단함을 사랑이 없음으로 오해하고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짝사랑 하게 되는 주변 사람들까지 불행해지기
때문이다.

p.163 '가을의 전설' 내용 중에서..

 알마시를 죽이려다가 실패한 제프리, 아내를 죽이고 정부에게 혐의를 덮어씌워 겉으로는 통쾌한 복수에 성
공한 영화 '해피 엔드'의 주인공, 트로이 전쟁을 일으켜 간부(奸夫)의 나라를 멸망시킨 메넬라오스, 이들은
모두 자신은 물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불행으로 몰고 갔다. 아내의 불륜에 대해서 (헤파이스토스나 처용과
같이) 너그러운 용서라는 신화적 해결을 생각해 내지 못한 옹졸함의 대가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너무 컸다.
 
p.220 '잉글리쉬 페이션트' 내용 중에서..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런 서술방식이 좋다. 동의
하는 사람은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을 얻을 것이고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런 생각도 있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다만 어느쪽이든 '사유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는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행히도 올해가 가기 전에 다시금 이 책을 읽어보고, 세상을 살아가는 나에 대해서 다시한번 되돌아보는 기
회를 가질 수 있었다. 올해가 가기 전에 교수님께 메일이라도 보내기로 한 다짐도 꼭 지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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