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8일, 토리야마 아키라 선생님이 급성 경막하 출혈로 돌아가셨다는 슬픈 뉴스가 전해졌다. 돌아가신 건 3월 1일이었고, 비공개로 이미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초등학생 때 드래곤 볼을 읽으며 자란 세대에게 토리야마 아키라는 말 그대로 신과 같은 존재였다. 깊은 애도를 표하며,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드래곤 볼 말고도 토리야마 아키라가 남긴 또 하나의 거대한 족적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드래곤 퀘스트. 1980년대 중반 에닉스가 소년 점프와 협력하여 기획을 시작했을 무렵, 이 세 사람이 모인 것부터 이미 전설의 시작이었다.
고등학생 때 게임 개발을 시작한 천재 프로그래머 나카무라 코우이치 (中村光一, 1964년생)
PC용 어드벤처 게임으로 두각을 드러내던 게임 디자이너 호리이 유우지(堀井雄二, 1954년생 )
드래곤 볼의 작가 토리야마 아키라(鳥山明, 1955년생)
앞의 두 사람도 대단한 인물이지만 역시 토리야마 아키라는 무게감이 다르다.
9년 후 스퀘어와 에닉스가 각각 게임업계를 호령하던 1995년 세 명 버전도 읆어보자.
파이널 판타지의 크리에이터 사카구치 히로노부 (中村光一, 1962년생)
드래곤 퀘스트의 아버지 호리이 유우지 (堀井雄二, 1954년생 )
드래곤 볼의 작가 토리야마 아키라 (鳥山明, 1955년생)
앞의 두 명이 일본 게임업계를 주름잡고 있던 시기임에도 토리야마 아키라의 무게감은 여전하다. 크로노 트리거 개발 당시의 사진은 언제 봐도 뭉클하지만, 토리야마 아키라가 타계한 지금 보니 더욱 감회가 새롭다.
Chrono Trigger Launch, 1995 (Akira Toriyama, Yuji Horii, Hironobu Sakaguchi)
byu/Adamantum1 inOldSchoolCool
돌아와서, 에닉스의 기획으로 시작된 드래곤 퀘스트는 1986년 드디어 세상에 발매되었다. 겨우 512kb에 담긴 전설의 시작. 이 RPG가 일본을 뒤흔들었고, 이후 20년 가까이 JPRG가 게임시장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된다.
요즘 게이머라면 드래곤퀘스트 빌더즈가 더 익숙할 지도 모르겠다. 빌더즈1의 세계가 이 드래곤퀘스트 1의 알레프갈드이기도 하다.
현 시점에서 원작과 가장 가깝게 즐길수 있는 것은 Wii로 발매된 드래곤 퀘스트Ⅰ・Ⅱ・Ⅲ. 패미컴으로 발매된 1,2,3과 슈퍼패미컴판 리메이크가 수록되어 있는데, WiiU로 플레이하면 부드럽게 스케일링된 화면으로 즐길 수 있다.
PS4로도 발매되었지만, 그 버전은 스마트폰 버전의 이식작이기 때문에 원작과 느낌이 많이 달라져서 추천하지 않는다. 도트 그래픽이 이상하게 까끌까끌해져 있고, 프레임도 뚝뚝 끊겨서 플레하기도 불편하다. 다만 한글이라는 이점은 있다.
Wii용 드래곤퀘스트의 무엇보다 큰 가치는 당시의 개발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는 것. 게임 크리에이터가 어떻게 게임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인터뷰나 당시의 회상록 같은 것이 대부분이라, 이렇게 공식적으로 남아있는 자료를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드래곤 퀘스트 기획서의 첫 페이지. 전설은 이 글귀로부터 시작되었다.
드래곤 퀘스트 아주 오래 전, 세계는 어둡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나 전설의 용자 로토가 신으로부터 빛의 구슬을 받아 마물들을 봉인했기 때문에, 이 땅에 평화가 찾아왔다. 빛의 구슬은 이 세계를 통치하고 있던 사우트 1세의 손에 넘겨졌고, 오랜 기간 평화는 지속되었다. 그러나 사우트 16세 무렵, 어디선가 출현한 용왕이 구슬을 빼앗아 어둠 속에 숨겼다(후략) |
그리고 지금은 세계의 누구나가 아는 '슬라임'도 함께 데뷔했다. 그 슬라임이 나온 기획서를 살펴보자.
슬라임. 부정형(不定形). 젤리 형태의 끈적끈적한 몬스터. 사람의 얼굴에 달라붙어 질식사시킨다. |
그 천재 게임 디자이너 호리이 유우지의 기획서이나, 사실 내용은 특별할 것이 없다. 당시 그가 즐기던 위저드리의 슬라임을 그대로 묘사한 내용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획서를 바탕으로 토리야마 아키라가 가장 처음 그린 슬라임이 바로 이것.
다시한번 기획을 돌아보면,
부정형(不定形). ⇒ 512kb의 용량으로는 애니메이션을 표현할 수 없다.
젤리 형태의 끈적끈적한 몬스터. ⇒ 보통은 기분나쁜 느낌을 받는다.
사람의 얼굴에 달라붙어 질식사시킨다. ⇒ 이쯤 되면 무섭기까지 하다.
기획서를 받아본 원화가의 입장이 되면 게임 디자이너에게 한 소리 하고 싶어지는 이 기획으로 모두에게 사랑받는 캐릭터를 창조해 낸 것이다. 토리야마 아키라의 천재성은 구성력과 데생력 등 너무나 많지만, 여기서 남다른 센스를 엿볼 수 있다.
몬스터의 능력치 테이블도 수록하고 있다. 드래곤 퀘스트를 처음 플레이해 보면 파이널 판타지와 달리 초반에 높은 빈도로 사망하곤 한다. 도라키를 귀엽다고 얕보다가 죽고, 슬라임 베스에게 멋모르고 덤비다가 죽고, 체력 약간 남긴 채 돌아오다가 슬라임을 만나서 죽고... 하지만 레벨을 1만 올리면 아주 수월하게 이길 수 있게 된다. 시간을 들여 강해지기는 RPG의 근본이지만, 직접 플레이해 보면 이 밸런스가 매우 절묘함을 느낄 수 있다.
시나리오와 대사 선택 시스템도 볼 수 있다. 캐릭터의 이름을 입력해서 출력해주는 시스템도 이미 준비되어 있고, 단순하지만, 대사 선택 분기도 이미 만들어져 있다. 이 선택지에서는 전무후무한 '공주님 안아들고 귀환' 이벤트가 발생한다. 대사와 시스템 기획이 함께 들어있는 것은, 이미 포토피아 연속살인사건과 같은 어드벤처를 만들어 온 호리이 유우지이기에 가능했을 듯.
몬스터 사이즈 조견표.
512kb라는 작은 용량에 게임을 담아넣기 위해서는 이렇게 다 설계해두어야 했나보다.
슬라임을 그려놓았나 했더니 참고용으로 수퍼마리오와 굼바를 그려놓은 거였다.
맵 디자인.
지금은 바로바로 찍어낼 수 있는 툴을 준비해서 만들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이 정도 기획을 해 놓아야 중간에 헤매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이걸 연필과 색연필로 다 그려놓는 것은 얼마나 지난한 작업이었을까?
여기를 조사하면 열쇠 획득, 보물상자 등의 위치도 쓰여있다. 말인 즉슨, 모든 맵에 대해 이렇게 상세하게 기획을 해 놓았다는 뜻이 된다. 툴이 있는 것이 아니니 이렇게 하지 않으면 구현 자체가 불가능했을 테니까.
월드맵.
알레프갈드의 지형을 이미 준비해놓고 있고, 배경에 사용할 이미지의 종류까지 파악할 수 있다.
(2에서는 플레이어 캐릭터가 3명으로 늘어난 탓인지 배경 이미지를 아예 검은색으로 해 버렸다. 게임 제작이 취사선택의 연속이었던 시기의 어쩔 수 없는 결단이었을 듯.)
언어사용 시스템.
사용할 수 있는 카타카나를 16개로 제한하고 있고, 그 조합으로 불가능한 단어는 미리 지정하여 출력한다. 여기까지 아껴야 했었다니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다.
부활의 주문 패스워드 입력 시스템. 당시 패미컴 팩에는 세이브를 하기 위한 메모리는 커녕, 데이터를 보관할 배터리조차 넣을 예산이 부족했기 때문에 패스워드를 입력해서 데이터를 복원하는 시스템을 준비했었다. 히라가나 2글자마다 각각의 진행 정보를 저장해두고 있었다. 이런 시스템을 게임 디자이너가 미리 고안하고 있는 것도 이미 기계어 프로그래밍에 능숙했던 호리이 유우지였기에 가능했을 듯.
고등학생이었던 나카무라 코이치는 이 두꺼운 기획서를 받아들고 어떤 느낌이었을까? '호오, 이걸 다 구현하려면 어떻데 설계할까..' 하며 두근두근 설레이는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제길 이걸 512kb에 어떻게 집어넣으란 거야!' 하며 화를 내고 있었을까. 오래전의 개발 풍경을 상상하는 것은 항상 즐겁다.
다음번엔 2편과 3편 기획서도 한번 엿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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