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셜록 홈즈 실크 하우스의 비밀'을 다 읽었다. 어렸을 때 읽었던 '명탐정 호움즈'의 느낌을 그대로 간직한 채, 요즘 헐리우드영화 각본으로 써도 될 만큼 훌륭한 사건의 구성과 이야기 전개가 돋보이는 수작이었다. 코난 도일 재단에서 공식으로 인정한 시리즈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실크 하우스의 비밀에 대해서는 사실 그 정도이고, 나는 '셜록 홈즈 대표 단편선'을 읽었을 때와 똑같이 어렸을 때 읽었던 '명탐정 호움즈'의 추억을 되새기기 시작했다. 이 책을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중학교 1학년 때 학원 선생님이 내가 갖고있는 책을 보시고는 그 책 나도 어렸을 때 읽었던 거라며 정말 오래된 책이라고 했던 일이다.
지난 포스팅에서 걸어둔 계림문고 호움즈 글을 보려고 했지만 링크가 깨져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검색을 동원해야 했다. 5분 쯤 걸려내가 본 호움즈가 70년대 말 계림출판사에서 나온 '소년소녀 세계추리명작단편 시리이즈'라는 것과 한국출판공사라는 곳에서 같은 시리즈가 다른 판형으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링크한 블로그에 써 있는 '따뜻한 군불의 방에 엎드려 이불을 덮어쓰고 추리소설을 읽었다'라는 표현이 왜이리 공감되는지..여기저기 추억하는 글이 많고, 중고책 사이트에도 종종 출현하는 것을 보면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꽤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다른 출판사에서 동일한 책이 나오는 것은 아마도 일본 책을 라이선스 없이 한국에 출간한 해적판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 것이 어둠의 루트로만 들어오던 80년대 초이니 뭐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추억에 젖다가 갑자기 '50권 분량의 책 표지를 누가 그렸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책 속의 삽화도 좋았지만 매 편 표지에 있는 삽화가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그렸을 것 같은 화풍에, 사건의 전모를 보여주면서도 스포일러는 아닌 아주 절묘한 구성을 보여주었고, 뒷장에는 표지 그림을 모아둔 그림이 똑같이 있어서 이건 누구일까? 이 사건은 뭘까? 하고 궁금증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토요일 오후의 잉여로운 상태 때문인지 갑자기 홈즈가 된 듯한 탐정 기질이 발동해서 원전이 무엇인지, 일러스트를 누가 그렸는지 알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상태가 되었다. 일전에 어드벤처 아일랜드와 팔도의 정체를 파헤쳤던 것과 같이 계림출판사부터 검색을 시작했다.
70년에 설립되어 아이들을 위한 책 중심으로 성장해 왔고 지금도 아동용 책을 계속해서 출간해 내는 좋은 회사인 것 같다. 70년대는 기간에 비해 큰 업적이 없는데, 아마도 꾸준히 출간한 계림문고 시리즈가 대박을 쳐서 점점 성장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역시 그 때의 책들은 출간 방식이 정상적이지 않은 만큼, 페이지에서 어떤 책인지 알려주지는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일본 사이트를 직접 뒤지는 수밖에 없다. 名探偵ホームズ로 검색하니 80년대에 방영된 TV애니 정보가 더 많이 나온다. シャーロック・ホームズシリーズ로 검색해야 비로소 홈즈 시리즈의 유구한 역사와 함께 일본 내의 출간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오오 벌써 찾은 건가? 읽어보자..
'일본은 영어권 이외에서 가장 빨리 홈즈가 소개된 나라 중 하나이다.'
'음 그렇군'
'메이지 32년(1899년)에는.....블라블라'
'뭣이!? 메이지?'
...해변에서 모래 줍는 격이라 포기하려고 보니 최근의 출판이력만 따로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8~10권 분량의 책들.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도 이 정도 분량으로 홈즈 책이 꽤 나온 것 같은데...여튼 없다. 일단 구성이 40권 이상 되어야 내가 찾는 그 책이 나올 것이 아닌가! 홈즈로는 답이 없었다.
다음 검색어는 출판사가 원전의 이름을 그대로 따 왔을 거라는 가정에 입각한 少年少女世界推理名作 シリーズ. 웹으로는 엄두가 안 나서 이미지 검색을 시작했다. 하지만 수백장의 이미지를 뒤져봐도 이상한 쓸데없는 것만 나오고..名探偵ホームズ―世界推理名作를 넣으니 그래도 추리에 관련된 것들만 나오기 시작했다. 여러 험짤을 거친 끝에 요런 그림을 하나 찾았다.
홈즈 = 숀 코넬리!?
홈즈 및 코난 도일의 오래된 책들을 소개하는 블로그에서는 이 책이 66년에 출간된 것으로 서양에서 헤이크래프트라는 사람이 아동용 탐정 소설을 모아 집필한 책을 후쿠시마 마사미라는 사람이 일본어로 번역한 책이라고 한다. 표지는 내가 찾는 그 그림체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느낌이 든다. 위에 링크한 블로그 중 팬더추리걸작선을 소개한 블로그에서 원전이 아카네 서방(あかね書房)에서 나온 것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 책도 바로 그 아카네 서방에서 나온 책이었다.
뭔가 잡았다 싶어 あかね書房 名探偵ホームズ―世界推理名作 으로 검색하니 팬더추리걸작선으로 소개된 책의 원전을 찾을 수 있었다. 번역서에 만화를 곁들여 아동용으로 낸 책이었다. 색채가 서양 스타일인 것은 의도적인 듯.
참고로 괴도 루팡은 코난 도일의 작품이 아니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
하지만 아무리 뒤져봐도 내가 찾던 계림/한국출판공사 홈즈의 그 일러스트는 나오질 않았다. 명탐정, 홈즈, 추리, 전집, 걸작, 명작 등등 단어를 조합해 가며 이미지 검색을 했다.
이 강아지와
이 콤비와
이 녀석들 그림을 수없이 뒤진 끝에..
이, 이거야!!!
두 시간 여를 수없이 많은 이미지(대부분 위의 세 가지이고 가끔 김전일)를 거쳐간 끝에 찾고야 말았다. 그런데 링크를 타고 가 보니 아까 66년도 아카네 서방 홈즈를 다루던 그 블로그였다-_-; 정말 먼 길 돌아왔다. 블로그에서는 작가를 중심으로 오래된 책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계림판 홈즈 원전이 언급된 포스팅도 모두 노다 카이사쿠라는 번역가에 관한 글들이다.
(구글 번역 돌리면 대충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한 번 읽어보시길..)
재미있는 것은 이 번역가의 이름이 노다 카이사쿠(野田開作)인데 번역을 넘어 번안 수준에 가까운 책이 많아서 노다 카이사쿠(野田改作)라고 불리우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다 카이사쿠가 실제 인명인지 확인되지 않고 있고, 이후 코난 도일의 다른 작품도 번역한 것을 보면 그냥 필명이 아니었나 싶다. 내 맘대로 개작하겠다는 의지의 표출인가?
포스팅을 보니 원작은 와트슨의 1인칭으로 서술되어 있지만 3인칭으로 바꾸어 전개하고 있고(도일의 원작 60권 중 3인칭으로 쓴 것은 2편), 대사 몇 마디를 추가해서 원작과 달리 비관주의적인 느낌이 들도록 수정하는 등, 그야말로 번안을 넘은 개작을 했다고 한다. 홈즈 시리즈에는 원작에 없는 대사를 추가했다는데, 한 번 읽어보시라.
1. 일이 잘 되지 않을 때의 홈즈 대사-
"아무리 애를 써도 오늘은 영 잡히질 않았어. 마치 물고기가 한마리도 없는 연못에 낚시하러 간 것 같았지. 총알이 장전되지 않은 총으로 새를 쏘는 듯한 기분이었어."(운명의 지문)
2. 커싱 부인에게 브라우너가 귀를 보낸 이유를 레스트레이드는 이렇게 설명한다-
"남미 오지의 토인들 사이에서는 얄미운 녀석에게 귀를 억지로 보내서 저주를 거는 풍습이 있다고 합니다. 그 흉내를 낸 거군요."(소포 상자의 수수께끼)
3. 사건을 해결한 후 경부가 홈즈에게 명탐정의 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하면 와트슨이 물러나며-
"명탐정의 비결이라고? 그런 건 실로 간단한 겁니다. 즉, 밤에 자지 않고, 천장을 바라보고, 담배를 잔뜩 피우면 되는 거에요"(입이 삐뚤어진 사나이)
4. 빈사의 홈즈('붉은 바퀴의 비밀'에 수록)에서의 프롤로그-
"어떤 인간이라도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어. 고릴라처럼 강인하게, 사자처럼 강하게 살았다고 해도..또 아무리 장수하는 약을 먹어도 어차피 인간은 죽음에게는 이길 수 없는 거야."
황당하기 그지없다. 당시에는 문학을 하는 사람과 번역을 하는 사람이 겹치던 시절일 테니 번역가들에게 자신만의 색깔을 내려는 욕구가 컸겠지만 이건 좀..인칭은 그렇다치고 아동용 책에 왜 이런 시니컬한 대사를 넣는 건지. 노다가 전쟁을 경험한 세대라서 그렇지 않을까 하고 링크한 블로그의 필자는 추측하고 있다. 여튼 우리는 이런 시니컬한 분의 편역을 읽으며 어린시절 꿈을 키웠으니..뭔가 아이러니다.
홈즈 전집에는 카이사쿠 외에 참가한 3명의 번역가들이 참여했는데 카이사쿠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비슷한 식으로 수정한 것이 많다고 한다. 그때문에 권마다 인칭이 왔다갔다 하는 등, 이 시리즈 전반의 평가가 좋지 않게 된 모양이다.
작품 전반에 대한 일관성 부재와 함께 일러스트레이션이 따로 논다는 불평도 하고 있는데, 그 덕분에 고맙게도 이 글을 쓰게 된 원인이 된 커버 일러스트레이터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범인을 잡은 홈즈가 된 느낌이다. 만세!!! ...라기보다, 처음부터 이 블로그만 잘 살펴봤어도 두 시간 검색하며 헤멜 일은 없었을 텐데..
타케베이 이치로(武部本一郎)
니시무라 유지시로(西村保史郎)
요리미츠 타카시(依光隆)
이시다 타케오(石田武雄)
이외에도 시라이 아키라(白井哲), 노자키 타케시(野崎猛)라는 사람이 담당했다고 한다. 위키피디아 찾아보니 1910~20년대 출생의 SF일러스트레이터 분들이었다. 내가 어릴 때 보고 멋지다고 생각했던 그림이 돌아가신 할머니보다 더 나이 많은 할아버지들의 그림이었다니..뭔가 신기한 기분이 든다.
정리해 보면, 결국 계림출판사/한국출판공사의 '소년소녀 세계추리명작단편 시리이즈'는 일본의 해성사(偕成社) 에서 나온 '명탐정 홈즈 전집'이었다. 해성사는 1936년에 설립되었고, 계림문고처럼 현재는 어린이용 책을 주로 출판하는 회사였다. 홈페이지에서 홈즈로 검색을 하니 책이 몇 권 나왔지만, 80년대 이후로는 최근 우리나라에 출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원전(셜록 홈즈의 모험, 셜록 홈즈의 추억 등)에 충실한 완역판을 내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원전이 22권이고 각 권이 200페이지가 넘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출간된 것은 끽해봤자 100페이지 쯤 되는 책이 50권 정도 됐던 것 같은데..한 두개의 에피소드만 쪼개서 50권을 맞추었다 해도, 표지 그림은 어떻게 한 걸까?
또 하나의 의문은 그럼 대체 어떻게 동일한 해적판이 2개 존재하냐는 것이다. 원작을 쪼개서 편집했다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해적판 홈즈의 인덱스를 찾아보았다.
위 블로그에서는 계림문고판으로 정정하고 있는데, 맨 처음에 링크한 계림문고판 스크린샷에는 에드거 앨런 포의 유령선(원제:아서 고든 핌의 모험)이 있고 이 인덱스에는 없으므로 40권은 출판공사 것이 맞다. 그러고보니 계림문고판에는 모르그가의 살인 사건도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홈즈가 70%쯤 되고, 나머지는 에드거 앨런 포우와 괴도 루팡 시리즈였던 것 같다.
해성사의 책을 정리한 페이지에 '유령선'의 일러스트가 있었다. 이 책은 추리와 관계없는 모험 시리즈이지만, 번역자가 홈즈에 참여했던 사람이고, 일러스트 역시 그런 것 같다. 계림출판사에서는 해성사의 다른 책까지 엮여 추리문고 시리즈를 냈던 것이다. 애초에 두 출판사가 별개로 해성사의 책을 출판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또다시 생기는 의문은 계림과 출판공사 모두 1권이 '사라진 지옥선'이라는 것이다. (계림판의 책 리스트를 보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사라진 지옥선은 원전 22권 중 3권으로 두 출판사 모두 이 에피소드를 1권으로 할 이유가 없으니, 해성사에서 추리물만 엮어 또 다른 시리즈를 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偕成社 名探偵ホームズ全集으로 이미지 검색을 했지만 그림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까 그 블로그 뿐. 일본 사이트를 더 뒤져봤지만 일본에서도 해성사판과 아카네 서방 판이 어떻고 섞여 있어서 더 이상의 탐색은 포기.그래도 20년 가까이 가지고 있던 의문이 많이 풀렸다. 따지고 보면 블로그 하나에서 다 찾은 셈인데, 아무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잉여로운 정리가 나에게는 수수께끼의 해답이 되었다.
그리고 나의 잉여로운 토요일도 이렇게 저물어 간다...끝!
>> 그리고 그 호움즈 책을 현지에 가서 찾아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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