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서점에 들러 게임개발 관련 서적을 십여 권 훑어보다가, 간만에 흥미있는 책이 보여서 집어들었다.
게임 디자인 프로페셔널(ゲームデザインプロフェッショナル)

FGO(페이트 그랜드 오더)크리에이터의 저서라는 점을 어필하고 있는데, FGO는 전세계 매출랭킹 1위를 찍었던 대단한 게임이지만, 플레이한 적이 없어서 일본 게임서적에 많이 있는 에세이형 성공담이지 싶었다.
그리고 조금 펼쳐서 읽어본 뒤 몇 분 지나지 않아 크나큰 착각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아니, 지금까지 읽은 게임디자인 책 중 세 손가락 안에 들 지도 모르겠다.
저자인 시오카와 요스케(塩川洋介)는 페이트 그랜드 오더로 유명하지만 2000년에 스퀘어(スクウェア)에 입사해서 킹덤 하츠 1, 2와 디시디아 파이널 판타지에 관여했으며, 2016부터 FGO의 개발사 딜라이트 웍스(ディライトワークス)에서 창작부문 사장으로 있다가 2022년에 퇴사했다. 2010년대 이후 게임 디자인의 명저 THE ART OF GAME DESIGN(일본판은 ゲームデザインバイブル)과 게임 디자인 레벨업 가이드의 일본 번역판을 감수하기도 했다.

1장 - 게임 디자인에 재능은 필요없다(ゲームデザインに才能はいらない)
도입부터 흥미로운 코멘트로 내용이 시작된다.
게임 디자인은 센스와 재능으로 하면 안된다
게임기획 입안은 게임 디자인이라고 부를 수 없다
게임 디자인은 매뉴얼이 8할
꽤 거센 표현들이지만 제각기의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수십 수백억이 들어가는 프로젝트를 어디로 튈 지 모를 천재에게 맡기는 것은 도박과 같으며, 게임 디자인의 8할은 매뉴얼화된 노하우를 통해 누구나 익힐 수 있다고 설명한다. 게임은 미완성의 리스크가 가장 큰 엔터테인먼트 산업이므로 8할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재미있게 만들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현실적이면서 흥미가 가는 도입부였다.
2장 - 게임 디자이너 본연의 업무(ゲームデザイナーの「本当の仕事」)
먼저 게임 디자이너(한국에서는 게임 기획자, 일본에서는 게임 플래너) 의 진정한 역할을 '재미있는 게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재미있게 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게임을 재미있게 하는 일이 발주, 구현(実装), 조정의 3단계에서 이루어진다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기획이 5할이고, 구현 및 조정 단계에서 게임이 재미있어진다고 생각했지, 발주가 게임이 재미있어지는 핵심 단계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임 디자이너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도 그 역할을 통해 명쾌하게 설명한다.
게임 디자이너가 없어도 게임을 만들 수 있지만, 게임을 재미있게 하는 일의 난이도가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게임 디자이너 무용론에 발끈하던 십수년 전의 나에게 이런 세련된 표현을 쓰라고 가서 말해주고 싶을 정도다.
3장 - 게임에 재미를 가져다주는 게임 디자인 기술(ゲームに面白さをもたらす、ゲームデザイン術)
2장에서 정의한'게임을 재미있게 하는 일'에 대해 좀 더 디테일하게 들어간다.
목표(하이 컨셉)을 설정하는 일의 중요성과 그 목표에 부합하는 아이디어 내기, 그리고 다시 발주, 구현, 조정의 3단계에 대해 바로 실행 가능한 방법론을 제시한다.
내용 하나하나가 다 알맹이라서 발주가 게임을 재미있게 하는 과정이라는 한 예만 들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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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디자이너는 상상을 뛰어넘는 결과를 이끌어낼 것(P.132)
➀'요건'을 통해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을 사전에 전달
→ '이 문은 플레이어보다 커야 하고 여닫을 때 캐릭터에 부딪히지 않아야 하며, 열리지 않는 문과 구별 가능해야 합니다.' 와 같은 식으로 요건을 명확히 설명.
➁'재량'을 통해 아티스트가 마음대로 바꿔도 되는 부분을 사전에 전달
→ 기본 ➀에 해당하지 않는 부분은 일임하는 전제. 거기에 더해 '이 부분은 게임 디자이너의 안보다 좀 더 좋은 안이 필요하므로 구체적으로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처럼 기대를 실은 발주를 하는 것.
➀과 ➁를 조합하면,
'문 사이즈는 플레이어가 드나들 수 있는 사이즈면 되니, 거기에 어울리는 디자인은 자유롭게 생각해 주세요' 같은 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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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초반에 공언한 '80%를 누구나 커버할 수 있는 매뉴얼'을 이런 식으로 실증한다.
물론 요건과 재량의 영역을 나눠서 발주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지만 이렇게 개념화/언어화해서 의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은 게임 디자이너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인 '발주'와 '커뮤니케이션'을 실행방법까지 포함해 정리해준다. 읽다보면 여러모로 일본에서 게임 디자인을 어떻게 하는지 간접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이 책의 전체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적어도 '발주하는 법'을 상세히 알려주는 책은 이 책 이외에 없었다.
4장 - 게임 개발을 성공으로 이끄는 리더십 기술(ゲーム開発を成功に導くリーダーシップ術)
이 챕터는 읽는 내내 발가벗겨진 듯한 기분이었다. 게임 디자이너가 빠질 수 있는, 그리고 내가 빠졌던 함정들을 하나하나 집어내고 있어서 뼈가 아플 정도. 그러면서도 그 각각에 대해 어떻게 하면 되는지 해결방법을 전부 제시한다.
과제를 던지고 '그 해결방법을 설명하겠습니다' 하며 솔루션을 제시하는데, 처음 몇몇은 반신반의하며 읽었지만 각각의 솔루션의 타율이 높아서 나중에 가서는 '이 과제는 또 어떻게 해결할까?' 하면 또 무릎을 치게 하는 솔루션을 제시해서 마치 추리소설의 주인공의 설명을 듣는 기분이 되었다.
오래전의 검과 회로, 얼마 전의 게임 기획의 정석과 같은 게임 디자인 서적의 명저를 읽으면 '훌륭한 통찰이다. 나도 저렇게 하고싶다'고 느끼긴 하지만 명확하게 '여기 쓰여진대로 하면 되겠다' 가 이토록 명확한 책은 없었다. 다만, 후반부의 '합의점 찾기'는 다른 자기계발서에도 있을 듯한 정론이었다.
[책] 검과 회로: RPG 기획을 위한 가이드 북
(번역판 이미지가 없어서 원서표지 쓱싹) 언식님께서 작년에 애타게 찾으시던 책인데, 인천 영풍문고를 2바퀴째 돌 즈음 우연히 눈에 띄어 그대로 집어들었다. 회사 동료분의 책상에도 꽂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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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기획의 정석
올해 끝까지 다 읽은 몇 안되는 책, 게임 기획의 정석.원서는 2013년에 출간된 책이라 무려 10년이 지나 번역된 셈인데, 지금 읽어도 도움이 되는 내용이 많다. 읽으며 인상적이었던 페이지의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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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 게임 디자인 능력을 배양하는 레벨업 기술(ゲームデザイン力を高めるレベルアップ術)
게임 디자이너의 실력을 배양할 수 있는 활동을 3가지 기초능력에 비추어 설명한다.
깔끔한 번역이 되지 않아서 일단 직역하고 설명을 조금 덧붙인다.
게임력(ゲーム力, 게임에 대한 지식과 소양)
어휘력(言葉力, 언어능력)
자신력(自分力, 자신만의 아이덴티티)
십수년 전 게임 기획자가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하나요 하고 물어보면 이런 대답이 돌아왔었다.
국영수에 충실해야 한다.
프로그래밍을 알아야 한다.
여러 방면에 해박해야 한다.(ex. 인지심리학)
필요성은 인지하나, 이 조건을 다 갖춘 사람은 그다지 많이 보지 못했다. 없지는 않지만 평범한 게임 디자이너에겐, 혹은 지망생에겐 너무나 막연하고 이상적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3가지 능력치를 방점을 찍어주는데, 특히 게임력에 대한 설명이 탁월했다.
과거의 게임을 통해 게임 디자인 소양을 늘리는 것은 게임플레이도, 시스템도, 경험도 아닌 (게임에 의한 )'감정의 변화와 인과관계를 재사용 가능하도록 이해하라' 였다.
가히 게임 디자인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인데, '평소에 게임 많이 하세요'의 조언에서 여기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
6장 - 게임 디자이너로서의 전투에 임하다(ゲームデザイナーとしての戦いに挑む)
아직 안 읽었다.(데헷)
주말 이틀 내내 5장까지 읽은 것만으로도 크게 효용감을 느껴 급히 글을 써 본 것이다. 6장도 읽으면 추가하겠다.
3장까지의 내용만으로도 현업 게임 디자이너가 자신이 하고있는 일의 본연의 의미를 찾고, 그 본연의 역할을 더 잘 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리라 본다.
3장만큼 머리를 망치로 맞는 정도는 아니지만 4장과 5장의 내용도 꽤 좋다.
게임 디자이너 지망생에게도 도움이 되겠지만, 그보다는 '왜 생각대로 일 진행이 안 되지?' 하고 고민하는 현업 게임 디자이너에게 효과적일 것이다.
출간된 지 4년이 지났는데 이런 좋은 책을 지 이제야 알다니.. 아무튼 한국에도 하루빨리 번역되길 바란다.
읽으면서 생각한 것
2000년대부터 2010년대 까지 정말 좋은 게임 디자인 서적이 한국어로 많이 번역됐었다.(게임 아키텍처 앤 디자인, 검과 회로) 같은 시기 게임 디자인이 가장 고도화된 일본 게임업계는 번역서가 적고 일본 국내 서적은 에세이류의 책이 많았고(팩맨의 게임학 입문, 게임에 대해 생각하는 것), 시간이 지나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정말 한국 게임업계는 한쿨임 멤버 분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책] 팩맨의 게임학 입문
영어가 안 되니 일서라도 게임개발에 도움되는 책이 없을까 항상 고민했는데, GDStudy의 성우씨가 알려준 책. 표지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팩맨의 개발자 이와타니 토오루가 쓴 게임개발 방법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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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사쿠라이 마사히로(桜井政博)의 게임에 대해 생각하는 것
'별의 카비', '대난투 스매쉬 브라더즈' 시리즈를 만든 사쿠라이 마사히로의 칼럼을 모은 책.지난번 소개했던Vol.2도 참 좋았는데, 품절이라 구하지 못했던 Vol.1도 마저 구입했다. 게임을 만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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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 게임 디자인의 명저들이 현업에서 바로 도움이 되기엔 간극이 좀 있었다. 현업에서는 하이레벨 게임 디자인 문서보다는 빼곡한 사양서(설계력), 빠른 구현 진행(프로그래밍 지식), 밸런싱(숫자 다루기)이 더 중요시되었고, 그걸 잘 하는 사람이 좀 더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게임 디자인 번역서들과의 문화적/환경적 차이도 있었다. 마치 인문학 책 같은 논조라서 읽고 나면 굉장한 뿌듯함이 있고, 독서력(?)도 증진되었으나, 활용하려면 전체적으로는 읽는 사람 나름대로 해석이 필요해서, 이 책이 좋다! 라는 건 알지만 이럴 때 썼다! 라는 경험은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이 없다.
2010년대 후반부터 한국에서 집필되기 시작한 게임 디자인 서적은 대부분 시스템 기획 / 밸런싱 등에 최적화된 경우가 많았다. (그 이전에도 한국에서 집필된 게임 디자인 서적 자체는 많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위에서 열거한 책과 비교할 수준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 책들은 앞에 언급한 번역서들보다 훨씬 실용적이고, 즉전력이 되었다.
다만 그렇게 한국에서 집필된 책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이전의 번역서들이 만든 '게임 디자인 서적' 출판문화 덕분이고, 즉전력이 되지는 않았을 지언정한국의 여러 게임 디자이너들에게 영향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한때 게임기획 책 좀 모았던 게임 디자이너의 단상이었다. 일본 서적중에 제대로 '게임 디자인'을 파고드는 서적을 처음 보기도 해서 여러모로 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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