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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게임 리뷰

2007/06/06 역전재판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6. 6.

초 뒷북 리뷰.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2, 3까지 즐겼겠지만 2001년 기준으로 썼으니 옛글 읽는 셈 쳐주세요.


 2D 어드벤처의 새로운 줄기

어둠속에 나홀로, 바이오 해저드로 대표되는 능동적인 어드벤처 게임이 나온 이후 기존의 2D 어드벤처
게임은 사장의 길을 걷게 되었다. '커맨드 선택'이라는 시스템으로 대표되는 일본식 어드벤처의 명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지만, 정점에 이르렀던 '폴리스 너츠' 이후 더이상 진보적인 발전은 없었다. 오히려
사운드 노벨처럼 복잡한 커맨드보다는 드라마를 보여주는 데만 집중하는 방식으로 변형되어 본래의 시
에 밀려 명맥이 유지되기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진구지 사부로'정도가 정통파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시리즈 역시 최근에는 아주 심플한 구성으로 등장하고 있다. (북미에서는 MYST를 끝으로 액션 어드
벤처가 완전히 대체했다고 할 수 있다.)

 법정 배틀이라고는 하지만, 크게 보면 역전재판도 변형된 일본식 어드벤처의 한 줄기에 해당한다. 법정
배틀이 메인이지만 실제로는 게임플레이의 많은 부분을 수사에 할애하고 있는데, 페이지 단위의 이동을
하고 커서로 화면을 클릭해서 증거물을 얻거나, 캐릭터와의 대화에서 정보를 추론해내는 과정은 2D 어드
벤처의 정석에 가깝다. 
                                                    

                                        이런 방식을 해 본 것은..아마도 동급생!?

 그러나 게임의  모든 수사과정은 게임의 하이라이트인 재판을 위한 준비에 불과해서, 모든 과정들을 아주
심플하게 처리하고 있다. 커서를 사용하는 수색이지만 조사할 곳을 찾기 쉽고 인물과의 대화 패턴도 단순
하며, 일정 장소에 들어서면 타이프 연출로 그곳이 맞다는 것을 알려주는 등, 플레이어는 무난하게 스토리
를 즐기며 단서를 모으게 된다.
                                                                         심플한 대화 메뉴


 게임 도중 완성되는 장르의 정체성
 

 새로운 장르를 표방하는 게임의 대부분은 기존 게임에서 약간 변형된 수준에 불과할 때가 많다. 정말 새롭다
면 굳이 그런 문구를 표방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폴리스 너츠도 사실은 인터랙티브 시네마를 표방하고 있
지만, 이전에 있던 어드벤처 장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역전재판도 앞서 언급했듯이 그런 점에서 완전히 자유
로울 수 없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것만은 분명하다.

 법정에서는 진행하는 동안 얻은 증거 파일들을 가지고 능동적인 사고를 해야 하는데, 이것이 역전재판이 기
존의 2D 어드벤처와 구별되는 가장 큰 이유다. '진구지 사부로'로 대표되는 커맨드 선택식 어드벤처가 사건의
핵심 추리를 서막부터 하이라이트까지 반복되는 인물과의 인터랙션과 스토리텔링으로만 풀어나가는 데 반해
역전재판은 법정에서 플레이어가 직접 그 과정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법정 공방의 룰은 아주 간단하다. 증언 도중 '뒤흔들다'커맨드로 증인을 심문하다 보면 약간씩 모순이 등장
하고, 그 모순을 확실히 증명하는 증거물을 '들이대다'커맨드로 제시하면 그만이다. 물론 적절하지 않은 증거
물을 제시하면 페널티를 얻기 때문에 증언과 증거자료를 면밀히 검토해야만 한다. 적절한 이의제기에 성공하
면 나루호도는 모순을 지적하며 증인을 한껏 몰아붙이는데, 그 모습에서 플레이어는 법정 드라마를 볼 때와
같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플레이어가 그 과정을 직접 수행하기 때문에 몰입도는 더욱 높아진다. 

                                                            여기서 성공했을 때의 쾌감이란..

 하지만 몰입과 자극을 제시하는 컨텐츠들이 그렇듯, 게임이 중후반에 다다르면서 플레이어는 '이의있음!', '먹
어라!'(주2)에 점점 둔감해지게 된다. 게임은 이 타이밍에 새로운 플롯을 제시하며 난이도를 높인다. 전반의 재
판들과 달리 범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고, 수사에서 명확한 정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증인 심문에서 단서를
찾아야 한다. 따라서 주된 게임플레이가 법정으로 옮겨지고, 플레이어는 핵심적 단서를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사고해야만 한다. 후반에 들어서야 게임은 진정한 '법정 배틀'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주 반복되는 억지스러운 장면은 몰입도를 떨어뜨린다. 증인은 위증과 말바꾸기를 반복하는데 재판장
은 선생님이 아이를 나무라는 정도의 경고만 내리고 재판을 진행한다. 아주 불리한 상황에서 극적으로 역전시
키고, 또다시 역전시키는 플롯을 위한 장치겠지만, 플레이어가 핵심을 모두 파악한 상태에서의 역전은 시간을
질질 끄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 재판의 가르마 검사에게는 정말 학을 뗐을 정도.

                                              증인이 거짓말을 했다면 위증죄를 적용해야 하지 않을까?


 제한된 성능으로 최고의 연출을 빚어내다

 역전재판은 GBA초기 논란이 되던 스펙 한계를 여실히 증명한다. 그래픽 표현능력은 SFC와 대부분이 같지만, 
해상도가 낮고 사운드는 같은 PCM음원인데도 훨씬 떨어진다는 것. 그러나 또한 그 장점과 단점을 적절히 이용
하고 있다. 

 2D 비주얼이 주가 되는 어드벤처라는 것부터가 SFC에서는 힘들었던 장르다. 카트리지의 제한된 용량으로 원
화 기반의 비주얼을 그렸을 때의 끔찍함이란..하지만 같은 그래픽이라도 GBA의 액정 속에서는 꽤 괜찮은 수준
의 비주얼로 거듭난다. 또한 다양한 애니메이션 패턴이나 검사 측에서 변호사 측으로 넘어올 때의 블러 효과 등 
기존 SFC의 게임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연출도 보여준다. (하긴 그런 장르의 게임이 거의 없었다.)  

                                                              작은 화면이기에 가능한 퀄리티

 공방이 계속되면서 단상을 두드릴 때와 허를 찔렸을 때의 효과음은 또다른 의미의 타격감(?)을 선사한다. 적절한
증거를 선택했을 때 '이의있음!!'과 함께 BGM이 꺼지고, 차근차근 사건의 열쇠를 진술할 때는 침이 꿀꺽 넘어갈
정도. 캐릭터가 놀랄 때, 의혹이 생길 때마다 다양한 효과음과 연출이 준비되어 있다.

  BGM은 패미컴 시절의 게임을 떠올리게 한다. SFC 게임의 리메이크에서는 비슷한 수준의 사운드만 들어도 '그
럴 듯 하다'라고 느꼈지만 역시 오리지널 게임에서는 숨길 수가 없다. 그러나 효과음과 더불어, 법정에서의 몰입
도를 가중시키는 데에는 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골똘히 생각하게 하는 BGM이 흐르다가 증인을 궁지에
몰아붙이면 한층 긴장된 BGM이 흐르고, 결정적 증거를 제시했을 때의 연출로 이어지는 등, 점층적인 긴장의 완급
조절이 훌륭하다. 
 

 일본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게임

 역전재판은 법정 배틀이라는 요소를 일본식으로 해석한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쉽고 간단
하게 구성되어 있지만 위에 언급했듯이 그 속에는 다분히 일본식 어드벤처의 속성이 숨어 있다. 군더더기 없이 심
플한 메뉴나 커맨드 인터페이스는 이미 80년대에 복잡성의 극한까지 다다랐다가, 18금 장르에서 아직도 2D 어드벤
처가 현재진행형인 일본의 게임 시장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들이다. 그 요소들과 한 사람의 열정(주2)이 법정 배틀
게임을 세상에 나오게 했다.

 어쨌든 'XX시스템 추가!'로 화려하게 광고하지만 속은 똑같은 게임과는 달리, 새로운 게임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로서는 법정 배틀을 게임으로 느껴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며, 꽤나 재미있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한
번 즐겨볼 것을 권한다. 쉽고 간단하기 때문에 골수 게이머가 아니라도 누구나 즐길 수 있다.

주1) 게임에서 증거물을 들이댈 때의 연출. 결정적 증거를 들이댈 때는 '먹어라!' 가 들어간다. 가끔씩 수사 도중에도
       개그성으로 연출될 때가 있으며, 재판이 끝난 후에 에필로그를 볼 때도 사용된다.

주2) 기획/각본/감독을 巧 舟한 사람이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