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내내 바빠서 얼굴도 못 보고 지낸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러 제가 사는 인천의 번화가(나름대로;) 주안역전에 오랜만에 나갔습니다. 사실 전철타러 주안역은 매일 갔지만 그 외의 목적으로 간 것은 3년 만이였습니다. 친구들을 기다리게 되어서 당연하게 학원가의 오락실 골목으로 들어갔는데...세상에..
제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전멸이였습니다.
제가 이 부근을 처음 다니기 시작한 것은 6학년 겨울방학이였습니다. 어디나 그렇듯이 인천에도 잘나가는 단과학원인 한샘학원(지금은 정문학원)이 바로 이곳에 있는데 저는 중1 예비반을 다니느라 여기에 처음 왔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은 학원이 아니라 바로 동네 오락실들과는 격을 달리하는 대규모 게임센터들이였습니다.
과목당 수업료 내고 등록해서 학생들의 '출석 자율성'을 보장해주던 그런 학원입니다. 기억하시나요?
그 때가 94년 겨울이니 동네 오락실은 '더 킹오브 파이터즈 94'가 한참 히트할 시절이였고 그 외에는 인기있는 나머지 SNK 격투게임들, 그리고 대만판 개조 스파의 잔존 세력이 돈없고 시간많은 초등학생들을 시기를 달래주곤 했었습니다. '뱀파이어-다크 스토커즈'나 '슈퍼 스트리트 파이터' 같은 고가의 CPS2 게임들은 가끔 한대씩 있거나 아예 없고, '버추어 파이터' 는 게임잡지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였죠.
더욱이 그런 상황에 초등학생이였던 저에게 이곳은 완전히 별천지였습니다. 게임잡지에나 나오던 '스트리트 파이터2 대쉬 터보' 가 구석에 있었고 슈퍼 스파2와 슈퍼스파2X, 뱀파이어 같은 게임들이 킹오파94와 나란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에 탄성을 질렀습니다. 하지만 동네의 영향인지 역시나 CPS계열 게임들보다는 네오지오 쪽 게임들이 인기있는 것은 여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비록 오래되었지만 동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세가의 '파워 드리프트'나 타이토의 '나이트 스트라이커' 등의 체감기도 저를 놀라게 했지만, 정말 눈이 번쩍 뜨였던 것은 뭐니뭐니해도 '버추어 파이터2'였습니다. 동네에서 구경도 못했던 버파1은 이미 옆자리로 밀려나 200원으로 가격이 다운되어 있었고, 300원이라는 고가에다 잭키의 '카운터 서머솔트킥 -> 대 다운공격'의 초간단 콤보(콤보라고 하기도 민망하네요)로 상대를 즉사시킬 수 있는 사기스런 셋팅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몰려서 게임을 하곤 했죠. 정말 G.I.JOE 피규어가 살아 움직이는 느낌으로, 그 때의 놀라움은 지금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상권이 상권이니만큼 저런 대규모 오락실이 5곳 정도 있었는데도 이듬해에는 프렌차이즈 게임센터인 원더파크까지 개업하면서 이 곳의 오락실은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서서 하는 미국판 기계의 버파2와 '데이토나USA' , 자기 얼굴사진을 찍어 치는 타이토의 '소닉 블래스트맨 리얼 펀처'까지...새로운 게임의 세계는 계속됐습니다. (며칠전 CGV에 가니 영화 '싸움의 정석' 프로모션용으로 이 낡은 게임기가 무료 시연되고 있더군요..)
게다가 그해 초에 저는 이 동네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라고 할까요? 그 해 여름은 저만의 게임 역사에서 가장 찬란했던 때가 아닌가 싶네요. 저와 비슷한 세대이든 아니든, 파이널 파이트와 스트리트 파이터2로 촉발된 아케이드의 황금기가 무르익어 간 시기라고 할 수 있는 95~96년은 아케이드 키드로서 정말 '아름다운시절' 이였던 것 같습니다.
고2때인 99년에는 여러분들도 아시듯이 제가 다니던 모든 곳이 '펌프장'화 되어버렸습니다. 분명 전에는 오락실에서 보기 힘들었던 '귀여운' 여학생(그 전에도 여학생이 있긴 했습니다만;)를 오락실에서 볼 수 있었고, 92년 당시에 스트리트 파이터를 지나치게 잘하면 '모르는 형' 에게 리얼 펀치를 맞는 결과밖에 없었던 반면, 이 때 펌프를 지나치게 잘하면 주위의 시선을 한몸에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분명 이 때를 '아케이드의 제2의 전성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파급력이 너무 컸고, 한순간에 끓어올랐다가 1년을 조금 넘겨 급격히 식어버렸던 그 파장이 아케이드 시장을 몰락시킨 사실도 이제는 과거의 흑역사가 되었군요.
개인적인 추억과 감격 일색의 글이 됐지만, 오늘 포스팅을 하는 것은 사실 그곳의 오늘을 보여드리려는 것입니다.
저에게 새로운 게임의 세계를 보여주었던 그 별천지는 황량한 무법천지가 되어있더군요..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고, 수많은 추억들은 단지 제 머릿속의 것들이기 때문에, 공감이 안 가실수도 있겠지만
그리스의 신전 터에 가서 신화를 상상하는 마음으로 보아 주세요-_-;;
왼쪽에 보이는 '모이세 분식' 은 94년 당시 이 지역에서 가장 크고 최첨단을 자랑하던 '주안컴퓨터게임장' 이였습니다. 간판에 네오지오 로고를 넣거나 최신 게임을 발빠르게 들여놓는 멋진 센스를 보여주었었고, 골목 입구에 있어서인지 버파2가 가장 활발하게 플레이되던 곳이기도 합니다. 많은 게임센터가 한두곳씩 사라지는 걸 볼 때에도 이곳만은 무너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윗 사진에서 멀리 가운데에 보이는 이곳은 '맘모스 오락실' 이였습니다. 입구 왼쪽에 보시면 쬐그맣게 '맘모스 게임랜드' 라고 쓰여 있네요. 위에 소개한 게임장처럼 버파같은 최신 게임을 타이밍 좋게 들여놓는 센스는 부족했지만94년 당시 이 부근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던 곳으로, 여기에 가면 어린시절 게임잡지에서만 보았던 파워 드리프트같은 게임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가장 많이 다니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은 맘모스 오락실 오른편으로 가면 있었던 곳인데 이름은 잘 생각나지 않네요. '청소년오락실' 이라는 커다란 글자만 보고 '아직 살아남은 곳이 있구나!' 하며 달려간 저를 반긴 것은 '임대문의' 벽보였습니다. 이 오락실은 다른곳에는 잘 없는 게임을 들여놓아서 또다른 매력이 있는 곳이였죠. '버추어 파이터 키즈', '아웃폭시즈', '이스케이프키즈' 등이 당시 이곳에서 자주 즐기던 게임입니다. D&D2 기계에 주인 아저씨가 써붙여놓았던 멋진 문구도 기억을 스쳐 가는군요. '4차원 세계로 가시는 분은 바로 오락실에서 쫓아냅니다' 그 당시보다도 더 오래전의 추억을 회상하게 하는 문구였습니다.
사진을 찍은 곳 이외에 네 곳 정도가 더 있었는데 거기는 아예 예전에 이곳이 오락실이였나 하는 사실도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렸더군요. 사실 가장 위에 붙여둔 학원 건물 앞이 가장 마지막에 간 곳으로, 그나마 학원 바로 옆에는 오락실이 하나 남아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을 봤을 때 든 기분은 그래도 아직 명맥을 유지하는 곳이 있다는 안도감이 아니라 다 꺼져가는 모닥불의 마지막 불씨를 보는 듯한 마음이였습니다.
바로 이곳입니다. 여기는 펌프의 열기가 전국을 뒤덮을 때 그 분위기에 편승해서 생겨난 곳이였는데, 전통의 명맥을 유지하던 곳들은 다 사라지고 이곳만 남아있더군요. 결국 여기서 친구를 기다리기로 마음먹고 들어가 봤습니다.
철권5는 1대밖에 없고 철권TT만 5대가 신나게 돌아가고 있더군요. 그나마 게임을 하는 유저층에 고등학생은 거의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사실 뭐 저도 아직까지 5보다 TTT를 더 즐기는 편이라 간만에 재밌게 하긴 했습니다.
어디를 거쳐서 왔을지 모를 '버추어 파이터4 파이널 튠드' 도 있더군요. 나름대로 버파를 즐겼던 저조차도 완전히 뒤바뀐 판정과 기술들때문에 한번 해보고 손을 놓아버린 게임인데, 버파4를 해보지도 않았을 사람들이 과연 이 게임을 얼마나 했을지 참 궁금해지는 순간이였습니다. 게임하다 재미없어서 두고 나가면서 찍은 사진입니다.
대학가의 오락실은 규모가 줄긴 했지만 나름대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데 고등학생들이 주 타깃층인 이곳은 완전히 '개발살'이 나 버린 상태였습니다. 물론 동네 오락실들이 사라지거나 사행성 게임센터화 되어가는 모습은 이미 익숙해서 더이상 아파질 마음도 남아있지 않지만, 대규모의 게임센터까지 이렇게 된 것은 상당한 충격이였습니다. 같은 대형 게임장이라도 고객층에 시간을 때우러 와서 고가의 게임들을 아무렇지 않게 즐기다 갈 성인(중에서도 젊은 층)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곳은 이렇게 되는군요. 서두에 농담삼아 그리스를 비유하긴 했지만 앞서 말씀드린 추억들이 있는 이곳을 오늘 보았을 때는 정말로 오래된 유적지에 간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글을 쓰며 천천히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결론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한참 이곳을 이용할 대상인 고등학생들은 저처럼 추억할 아케이드 게임이 없겠죠. 게임센터에 관한 추억이라면 그저 신나게 뛰던 형들, 누나들을 본 정도일 것이고, 오락실보다는 게임방에서 스타크래프트를 했을 것입니다. 온라인 게임에 익숙한 이들을 끌어들일 아케이드 게임조차 나오고 있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아케이드 게임의 대부분을 만들고 있는 일본은 나름대로의 대안을 모색하여 새로운 게임센터 문화를 창출, 시장을 유지해 가고 있지만 아무래도 그것을 한국의 게임센터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힘들 것 같습니다.
여러가지로 아쉬움과 회한이 한번에 몰려옵니다. 시대의 변화는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황금기를 추억하는 사람들에겐 너무나 가혹한 것이군요. 쓸쓸한 기분으로 포스팅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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