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게임 키드라면 많이들 거쳐갔을 게임이 하나 있다.
제 4차 슈퍼로봇대전과 슈퍼로봇대전 F.
이 게임이 발표된 97년 당시는 에반게리온이 한국 오덕계에 큰 바람을 불러일으켰고, 상대적으로 건담은 예전 것이라는 느낌이었다.
그 즈음에 학교 앞 애니메이션 가게(라 쓰고 복제와 밀수의 블랙마켓 으로 읽는다)에서 처음 주문한 애니메이션이 '기동전사 건담 0083 극장판 지온의 잔광'(機動戦士ガンダム0083 劇場版 ジオンの残光)이었다. 이 애니메이션을 보면 스토리 흐름 상 주인공 코우 우라키 소위를 응원할 수 밖에 없는 기분이 된다.
그래서인지 슈퍼로봇대전 F에서도 열심히 키웠고, 전투를 하면 해당 애니메이션의 BGM이 나오기 때문에 THE WINNER를 아주 많이 들었다.
슈퍼로봇대전 F에서는 가라오케 모드에도 이 곡이 추가되어서 자주 돌려보곤 했다. 이 스크린샷 세 장만 봐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한다.
그 뒤 TV판의 오프닝 THE WINNER도 찾아듣게 되어, 드디어 전자음이 아닌 보컬로 가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TV판 건담 0083 스타더스트 메모리를 본 것은 의외로 꽤 나중인 2012년이었다. 화면에 0079라는 숫자가 찍히고, 코우 우라키 소위가 달려가는 모습과 함께 숫자가 올라간 뒤 사이틀이 나오는 시퀀스는 특별한 연출은 없지만 이 멋진 인트로의 선율 덕분에 상당히 멋지다.
당시 처음 들었을 때는 분위기를 고조하는 인트로에 비해 조금 힘이 빠지는 보컬이라는 감상이었다. 92년이니 이미 예전 애니메이션이지만 그보다 조금 더 오래된 듯 탁한 보컬이라는 느낌이었달까.
2기 오프닝인 MEN OF DESTINY는 인트로도 더욱 고양감이 있고, 그 인트로조차 찍어누르는 듯한 파워 보컬이라 1기 오프닝은 상대적으로 약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G건담 2기 오프닝 TRUST YOU FOREVER과 함께 들으면 가슴이 뜨거워지는 대표적인 곡 중 하나였다.
특유의 리듬감 있는 오프닝과 시원한 곡 전개 때문에 1기 오프닝 역시 자주 들었다.
그리고 시간은 20년 이상 흘러, 시티팝이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지게 된 일등공신 중 하나가 마츠바라 미키의 Stay With Me. 다만 개인적으로는 조금 왠지 맞지 않아서 시티팝 컴필레이션을 들을 때도 넘기곤 해서 시티팝에 한참 빠져든 뒤에도 마츠바라 미키의 노래는 거의 듣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기획이 너무나 풀리지 않던 2023년 1월의 어느날 밤, 마키바라 미키의 이 앨범을 듣게 되었다.
첫 곡부터 마지막 곡까지 거를 타선이 없는 베스트 앨범으로, 곡마다 분위기가 각각 다르기도 해서 마츠바라 미키의 보컬 음색이 얼마나 다양한지 알 수 있다. 주변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분위기에서 앨범을 걸어두면 집중하기 좋다.
2번 트랙 It's So Creamy부터 11번 트랙 CUPID까지는 스타일이 제각기 다른 곡인데도 컨셉 앨범마냥 물 흐르듯 흘러간다. 이 앨범을 기획한 에디터의 관록이 느껴지는 부분.
9번 트랙 夕焼けの時間です(노을이 질 시간이에요)는 조식 중식 하는 부분이 계속 머리에서 맴도는 효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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久し振りに早起きして
오랜만에 일찍 일어나서
とても ゴウカにお洗濯
아주 호화롭게 세탁을 하고
だから朝食 美味しい朝食
그러니까 조식 맛있는 조식
バルコニーを 開け放し
발코니 창문을 열어두고
九月の風 肌に感じ
9월의 바람을 살갗에 느끼며
だから昼食 美味しい昼食
그러니까 중식 맛있는 중식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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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앨범을 무한 반복 재생하면서 이틀정도 철야를 거듭, 머리를 꽁꽁 싸매던 기획도 꽤 괜찮은 결과를 냈다.
지금도 기획이 풀리지 않을 때 최후의 보루 비슷하게 이 앨범을 듣곤 한다.
그러던 또 어느날, 오랜만에 맥주도 한 캔 따고 그리운 애니음악 플리를 돌리던 중 THE WINNER가 흘러나왔다.
아 이 인트로는 역시 명불허전이지
아 이 보컬은 역시 조금 약하지..
하고 흥얼거리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너무 낯이 익는 것이었다.
어라, 이 목소리 혹시...?
하고 그제서야 유튭 뮤직에서 가수 이름을 클릭하니 Stay With Me와 THE WINNER가 나란히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엄청난 조회수의 격차를 보라!)
20년 전에 느낀 그 어색함의 이유도 알 수가 있었다. 마츠바라 미키의 조금 탁하면서 쫀득쫀득한 재즈 보컬이 THE WINNER의 그 고양감 있는 인트로에 얹어졌으니 어색한 것이 당연하다.
20년 이상을 경계로 한, 전혀 다른 시간대의 전혀 다른 장르의 음악이 같은 사람이 부른 것이었다니!
마츠바라 미키가 한참 활동하던 시기인 80년대 초 이 곡이 발표된 90년대 초에는 10년이라는 갭이 있다. 지금 보면 모두 다 너무 옛날이지만, 90년대는 이미 시티팝이 메이저에서 많이 사라졌을 즈음이기도 해서 본래는 하지 않던 애니메이션 주제가를 취입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그럼 지금은 뭘 하실까 하고 찾아보니 안타깝게도 2000년대 초에 병으로 하늘나라로 가셨다고 한다.
90년대 오덕 꿈나무들에게 THE WINNER가 그렇게 사랑받고, 2010년대 후반 Stay With Me가 전세계적 메가히트 급으로 사랑받는 것을 아시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 지 상상해 본다.
P.S. 이 글을 여기까지 읽으신 분이라면 이미 많이 들으셨겠지만, 김국환 님이 부르신 건담 0083 극장판의 MBC 방영판 오프닝도 함께 띄워 본다. 코우 우라키의 연기가 비벌리 힐즈 아이들의 딜런의 연기같이 들리기도 해서 듣는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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