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날은 중요한 볼일이 있었는데 2시 약속이라 시간이 난 김에 계획에 없던 서점이나 둘러보기로 했다. 1학년때 전공수업 독해 들을 때 헌책방이라는 챕터가 있었는데, 그 탓인지 간다 진보초를 언젠가 꼭 가보리라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 생각없이 간다 역에서 내렸는데....
고서점가가 있는 간다진보초는 진보초 역이었고 간다 역에서는 도보로 1.6km 였다. 가까우니 지하철 다시 타지 뭐..생각했는데 1.6km 가려고 2번을 갈아타야 하는 캐안습한 상황. 다행히 폭염이 오기 전이었기에 거리 구경도 할 겸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오차노미즈 대학 쪽으로 조금 헤맸다가 지도 보며 계속 가니 큰 길이 나왔다. 2PM 새 앨범 나와서 들썩이는 모양.
1km쯤 걸으니 슬슬 더워서 삼성당 서점이라는 제법 큰 서점으로 들어갔다. 혹시나 게임개발 관련 서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곧바로 기술서적 코너로 직행했다.
우리나라에도 꽤 번역되어 있는 '만화로 배우는 XX학' 시리즈가 있었고, 흥미를 끄는 과학관련 서적이 꽤 보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동서적 코너가 아니면 보기 힘든 구성.
좀 더 걸어가니 뭔가 신기한 책들이 보였다.
음? 이게 무슨 책들이지?
..이건 원주율 100만행 표. 그러니까 소수, 원주율, 자연상수를 쭉 늘어놓은 책들이었다. 근데 자연상수는 위키를 봐도 뭔지 모르겠네..
머리아픈 곳을 지나니 나의 기대를 뛰어넘어 무려 게임의 왕국 코너가 있었다! 얼마 전 출간된 SF사전과 판타지 사전이 있다. 미스터리 사전도 번역중일라나..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자.
4년 전 관심을 가졌던 알고리즘 매니악스 시리즈. 퍼즐 알고리즘 매니악스도 나왔고, 슈팅게임 알고리즘 매니악스는 개정판이 나왔다. 어쩐지 슈팅게임 알고리즘 매니악스만 절판이다 했더니만..스크립트 언어를 활용한 효율적인 게임 개발은 06년 나름 팔렸던 '루아를 이용한 민첩하고 효과적인 게임 개발'의 일본어판이려나? 저자가 일본인인 거 보니 아닌 거 같다.
오른쪽 위에는 흥미로운 책이 보인다. 연필 퍼즐게임 프로그래밍. 스마트폰에 퍼즐 게임도 많은데 이 책 번역되면 여러 아마추어 개발자들에게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 왼쪽 아래의 물리...는 관련된 책 우리나라에도 많으니 넘어가도 될 것 같고.
그 옆으로 돌아가보니 게임기획 관련된 책이 많이 있었다. 건담과 일본인은 어떤내용일까..소개할 책들은 아래에 따로.
게임 두뇌(맨 윗줄 왼쪽 끝)
'나의 시체를 넘어서 가라'를 만든 디렉터 아저씨가 쓴 책. 저자가 만든 게임이 참신하기도 하고, 그런 발상의 근원이 된 이야기들이 있어서 있어서 재미있었다.
게임을 만들며 생각하는 것 (둘째줄 왼쪽의 파란 책)
별의 카비와 대난투의 디렉터 사쿠라이 마사히로 씨의 신간. 게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패미통에 연재하던 글 모음이었는데 이 글은 어떤 내용일지 궁금하다. 그 아래에는 '게임을 즐기며 생각하는 것'이라는 책도 있다.
팩맨의 게임학 입문(셋째줄 왼쪽에서 2번째의 검은 책)
이전 포스팅 참조. 번역판이 많이 팔리지 않는 것 같아서 좀 아쉽다.
요코이 군페이 게임관 (둘째줄 왼쪽에서 3번째의 갈색 책)
게이머즈에서도 자세히 소개된 요코이 군페이의 인터뷰 책. 90년대에 나왔다가 복각된 책이다. 요코이 군페이가 만든 물건과 장난감을 소개하고, 그것들이 나온 배경을 본인과의 인터뷰를 통해 소개하는 책. 그 아래에 있는 '게임의 아버지 요코이 군페이 전'은 게임관의 저자가 인터뷰 당시를 회고하며 쓴 책인데, 위 책과 기본적으로는 비슷하고 같은 이야기의 반복이 많아서 별로였다. 게임관은 닌텐도DS 바람이 불 때 번역됐다면 참 좋았을 텐데...아 그땐 복각이 안 됐던가. 여튼 게임 크리에이터 시리즈가 계속 나온다면 게임 두뇌와 함께 1순위에 올려야 할 책.
게임 유의(둘째줄 왼쪽에서 2번째의 회색/노란색 책)
읽어보진 않았지만 트위터에서 이 책 이름의 계정을 팔로우해서 일부 내용을 본 책. 거물 크리에이터와의 인터뷰 내용이 실려있는 듯 하다. 사카구치 히로노부 아저씨가 다나카 히로미치 아저씨랑 대학 때 위저드리를 지도 그려가며 한 이야기가 나와있다. 재미는 있을 것 같은데 '게임업계 일본을 건설한 거인들'과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은 책.
좀 더 멀리서 찍은 사진. 소셜게임 책도 몇 권 보인다.
처음 사진의 근접촬영. 엔도 마사노부 아저씨의 책도 보인다.
궁금한 책들이 꽤 있었지만 환율의 압박으로 사지는 않었다. 아마존에서 구매할 수 있으니 급할 것이 없기도 하고. 방대한 규모와 깊이를 자랑하는 공략집이나 설정집에 비해 개발관련 서적은 일본도 생각보단 많지 않은 것 같다.
걷고 걸어서 드디어 진보초 도착.
헌책방이지만 동대문 헌책방길 같은 느낌이 아니고 깨끗한 가게가 많았다.
요 가게밖에 안 찍었지만 에도시대 책을 파는 가게나 오래된 전집 같은것만 전문으로 파는 가게 등 다양한 가게가 많았다.
'뭐시기 비주얼 샵'이라고 쓰여있어서 들어가보니, 80~90년대 아이돌 사진집을 파는 가게였다. 마츠다 세이코나 나카모리 아키나의 리즈시절 사진들이나 앨범도 있고 레어 아이템들이라고 가격도 꽤 비싸게 매겨져 있었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오카다 유키코 사진도 팔고 있었다는 것이다 ㄷㄷ;
일본을 다니며 전체적으로 느낀 것은 아날로그 문화가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 많다는 것. 10년 전에 일본에 왔을 때는 지하철 표도 자판기로만 팔고 음식값도 자판기로 내서 뭔가 야박한 느낌이 들었는데, 10년 사이 우리나라 지하철에는 역무원이 없어지고 헌책방이나 대여점(필요악 정도로 생각하고)도 싹 사라져서 이제는 우리나라가 더 야박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문학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서 거리의 가게들은 한 시간만에 대충 다 둘러보았다. 시간이 좀 더 남아서 뭘 할까...하다가 갑자기 뇌리에 스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70년대에 나온 책을 지금 구하다니 말이 되나..싶었지만, 역사와 전통이 깊은 곳이니 혹시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시간은 두시간 쯤 남았지만 헌책방을 다 뒤지자니 갑자기 다급해졌다. 40년 전에 활발히 책을 내던 작은 출판사를 이야기해도 알 사람이나 있나 싶고...일단 처음 갔던 깨끗한 책방부터 가서 물어보았다. 출판사 이름을 알리는 것도 꽤 힘들었는데...
의외로 답은 간단한 데서 나왔다. 점원은 내 아이폰을 잠깐 쓰겠다고 하더니 헌책방 DB 사이트를 찾아주었다. 책 이름을 검색하면 그 책이 있는 헌책방 리스트가 나온다. 오오 그렇다면 오늘 내로 명탐정 호움즈를....!!!! 리스트 첫 페이지부터 쫙 나왔다. 오오 사는 것인가!! 했더니 큐슈에 있는 서점 -_-;
페이지를 몇 번 넘겨보았더니 신주쿠 쪽에 있는 서점에 두 권이 있었다. 그러나 약속시간이 다 되어 바로 들르는 건 무리. 밥이나 먹기로 했다.
식당을 찾다 발견한 50엔 게임센터. 들어가니 담배냄새와 약간의 곰팡이 냄새가 확 풍겨왔다. 80년대의 흔한 한국 오락실의 그 풍격이랄까? 양복입은 아저씨들이 담배를 푹푹 피며 빠찡꼬를 땡기고, 옆에는 오래된 게임기들을 하는 사람도 보였다. 분위기가 워낙 험악해서 내부 사진은 못 찍었다.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장어덮밥으로 결정! 일부러 조그맣고 일본스러워 보이는 가게를 골랐다.
큰 맘 먹고 1500엔짜리 대자 장어덮밥을 주문했다.
오오오 이것이 본토의 장어덮밥!!! ...이었지만 맛은 그냥 보통이었다 -_-;
아쉽게도 책은 저녁에 찾게 되었다. 볼일을 보고 나서 구글 지도를 찾으며 한참을 걸었다. 신주쿠 구 어디어디였는데 역 이름이 모를 한자(早稲田)라서 한참을 헤맸다가 도착. 그 한자는 와세다였고, 서점은 와세다 대학교 앞 헌책방이었다.
오오 이곳에 홈즈가!!
들어가니 주인 할머니가 혼자 앉아계셨고,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물었다.
"명탐정 홈즈 있나요?"
"명탐정 홈즈? 없는데?"
"....................."
바닥에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혹시나 해서 해성사(명탐정 호움즈 포스팅 참조)에서 출판된 책이 없냐고 물어보니 '아 그거!'하면서 갑자기 홈즈 책을 꺼내주셨다. 뭥미 -_-..하지만 너무나 기뻤다.
오오 호움즈!!!
지난번 인터넷 상에서 호움즈를 찾을 때도 먼 곳을 돌다가 굉장히 가까운 곳에서 단서를 찾았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애초에 헌책방 사이트만 알았으면 간단히 찾을 수 있는 것을...
다섯권 쯤 있었는데 권당 2000엔이라 두 권만 샀다. 주인 할머니는 왠 한국사람이 이런 책을 찾냐며김치오덕이냐며 한 권은 1000엔을 깎아서 3천엔에 모두 살 수 있었다. 두꺼웠지만 어릴 때 보던 그 홈즈의 일러스트가 그대로 있었고, 황토색으로 바래진 책장에서는 그 때의 냄새가 났다. 아 물론 이 책은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것보다 10년은 더 먼저 출간된 것이지만 말이다.
1학년 때 수업의 기억 때문에 아무 생각없이 들렀던 간다 진보초는 내게 큰 추억을 마련해 주었다. 아마존으로 왠만한 책은 다 구할 수 있고, 이 북이 날로 커져가는 요즘이지만, 그래도 이런 맛이 계속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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