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이야기 공작소

[책]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본문

책/인문

[책]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두릅이 2009. 4. 29. 01:03



 드디어 다 읽었다!!


 4년 전 신화와 상상력 수업을 듣던 중 쉬는 시간에 교수님께 '스타워즈의 기원은 어디서 찾아야 하나요?'
라는 질문에, 조지 루카스가 조지프 캠밸을 받들어 모셨다는 후일담과 함께 추천받은 책. 하지만 받아적은
수첩에는 '천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라 적어둔 탓에 '천개'로 검색하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천' 으로
검색하면 수많은 책이 나와서 결국 찾지 못했다.

 이듬해 도서관에서 발견! 더구나 새로나온 양장본! 드디어 읽게 되었지만 읽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 덮어버린 채로 3주의 대여기간이 지날 때까지 건드리지도 않고 반납했다. 기억나는 내용이라고는 초자
연적인 조력(자)에 대한 내용과, 스타워즈에서는 요다가 그 역할이구나..하는 정도였다. (그러면서 뭔가 신
화 이야기를 꺼낼 때에 항상 읽은 것마냥 언급하고 있었다-_-;)

 과학혁명의 구조와 감시와 처벌 등 한국어인데도 몇 번을 생각해야 해서 마음이 여유로울 때로 미루고 있는
인문서적들처럼 이 책도 왠지 다시 읽어보기 겁나는 리스트의 상위권에 있었는데, 오랜만에 텍스트에 대한
욕구가 충만할 때 '사지 않으면 읽을 수 없다!' 는 생각에 구입했다. 읽고 난 생각으로는, 사고를 연속적으로
해야 하는 철학서적보다는 훨씬 읽기 쉽다. 하지만 잠시 정신을 놓으면 내가 뭘 읽는지 모르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오래전에 쓰여진 탓이거나, 아니면 내 주의력 부족의 탓이거나..

 신화 해설서라면 토머스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 밖에 읽은 것이 없어서, 이 책 역시 그저 신화를 체계적
으로 정리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 예측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기본적으로 신화를 이야기한다는 점은 맞
지만, 신화를 정리하고 요약하는 수준을 넘고 있다. 수많은 신화를 바탕으로 융 학파의 심리학 이론에 기반하
여 저자가 일반화한 어떤 패턴을 제시하는, 해설서라기 보다는 이론서이다. 

 영웅의 모험은 이 세계의 보이지 않는 단면(주로 저승)이 무대이고, 그 끝에는 어머니의 모성과 동일시되는
잠자는 공주가 기다리고 있으며, 귀환 후에는 아버지와의 화해를 통해 자신이 아버지와 하나되는 과정에서
비로소 영웅의 모험은 끝나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은 인간의 무의식(주로 꿈)에서도 자주 발견된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으며, 후반에 가면 그 과정이 우주의 탄생과 소멸로 확장되고, 그 시작과 끝이 하나라는 순환적
흐름의 반복을 일깨우게 된다. 

 저자가 설명하는 패턴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그리스 로마 신화는 물론, 중국 / 이집트 / 인도 / 인디언 민담 /
아프리카 부족 신앙 / 잉카와 아즈텍 문명까지 폭넓은 신화가 인용되고 있으며, 그런 것들을 읽다 보면 어느
소설이나 영화, 애니메이션 등에서 보았을 법한 플롯이 수없이 나온다. 아무리 체계화된 이야기를 쓴다고 해
도 그 안에는 작가의 무의식이 반영되기 마련이며, 그 때문에 이야기는 이렇게 패턴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지금까지 본 시나리오 플롯 책들은 수학으로 치면 꽁수풀이고, 이 책은 정석으로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본문에는 시나리오를 쓰는 데에 참고하라는 말은 한 자도 없는데 말이다.)

  여느 신화 해설서가 무릇 그러하지만, 이 책에서도 우주 중심의 신화(무의식)적 관점이 산업화와 개인 중심
의 사고(의식)적 관점으로 대치되고 있고, 그것을 극복할 창조적 영웅이 나타나기를 갈망하며 글을 맺고 있다.
1940년대에도 이미 그런 생각을 했구나...하지만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1850년대이니 뭐, 이런 생각 역
시 헬레니즘 이후에는 보편화된 생각이 아닐까..?

 한때 유구한 세월을 끊임없이 변용되고 보완되어 짜임새 있는 구조를 갖게 된 신화를 기본 뼈대만 가지고 오
픈했다가 점점 컨텐츠를 추가하여 탄탄한 구조가 되는 온라인 게임에 빗대어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거기에서 한 발 나아간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수많은 이야기 속에 나타나는 
사람들의 무의식이 일반화된 세상이 신화라면, 수식과 규칙을 사용해서 개발자의 무의식이 일반화된 세상이
게임이다. 물리학 역시 일반화된 세상이지만, 거기엔 무의식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흔히 게임을 영화와 비교할 때 '상호 작용성'의 유무를 가장 큰 차이로 든다. 하지만 그것은 게임을 어떤 '체험'
으로 정의할 때 범하는 오류는 아닐까? 그보다 더 큰 차이는 이 책에서 거론되는 신화의 특성, 즉 시작과 끝이
계속 반복되는 '순환구조'의 유무가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는 시작해서 끝나면 되지만, 게임(프로그램)은 끝나면
다시 초기화를 해야 한다. 그렇게 순환되는 '세상'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게임은 신화와 공통점이 있다.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고 느낀 것은 많지만, 하나로 관통시키는 데에는 실패해서, 무언가 정리하려고 애를 쓴
흔적이 위의 글이다. 읽다가 잠시 책을 덮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고, 읽고 나면 저자가 바라보는 세상은 이랬
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참 좋았다. 신화에 재미를 붙인 김에 구스타프 슈바브의 그리스 로마 신화
의 남은 2권도 마저 읽어야겠다.
0 Comments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