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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설, 에세이

[책] 우리는 사랑일까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4. 6.
 사랑에 관한 책을 읽고 싶다던 지인이 권해준 책. 책을 대략 훑어보고는 이건 사랑이 아니라 현실주의
라는 생각을 했다. (마치 영화 '봄날은 간다' 처럼!)  

 기본적으로 이 책은 연애소설이다. 앨리스와 에릭이 사랑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중간중간 저자가 개입
해서 서로의 심리를 풀어내는데, 그 비유와 설명이 너무 적절해서 으레 말하는 공감을 한다. 

 에릭은 연애를 할 때마다 이중 안감을 넣은 양복으로 옷장을 채웠다. 사랑이 대들보가 아닌 삶, 행복의
토대를 자율이 아닌 다른 것에 양도할 필요가 없는 삶을 만드는 게 목표였다.
 이 점에서 우리는 건축가들을 낭만파와 지성파로 나눌 수 있다. 지성파 건축가는 건물의 무게를 여러 
기둥(많을수록 좋다.)에 분산하는 것을 기본 방침으로 삼아, 사고가 나더라도 다른 기둥들이 무너진
기둥의 몫을 나누어 지도록 한다.

...(중략)

 앨리스는 이와 딴판으로 매우 현명하지 못한 건축가였다. 그녀는 모든 욕구를 기둥 하나에 모으는 경
향이 있었고, 그 기둥 하나가 온 무게를 견디길 바랬다. 


  중요한 대목마다 저자가 끼어들어 사랑에 관한 수많은 개념과 이론을 만들어낸다. 초반을 지나면서부
터는 일상적인 설명보다 인문학적 이론을 곁들여가며 비유를 하기 시작한다. 에릭과 앨리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번에는 저자가 또 어떻게 지금 상황을 풀어낼까?' 기대하게 되고, 또한번 무릎을 치며 공감
하고, 다시 이야기를 읽게 하는 완급 조절이 훌륭하다. 단지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생각을
듣고 나도 생각하게 된다. 독서는 저자와의 대화라는 것이 다른 게 아니다. 이런 거지.

 나는 앨리스의 행동과 심리를 읽으면서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특히 마지막 이야기인 '순교'는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몇 번을 다시 읽었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감정적으로 너그러워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뭐든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것이
언제나 앨리스의 자기 개념이었다.흔히 자신을 성숙하게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이를 거부하지만, 그녀는
사랑을 희생의 '장'으로 여겼다.

...(중략)..

 하지만 그녀가 그 남자를 선택한 것은, 그 남자로 인해 그녀 자신은 실제로 그렇게 할 필요가 없어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만족감을 얻었기 때문 아닌가?


 버스에서 이 대목을 읽다가 눈물이 핑 돌아버렸다. 그건 회한일까 분노일까 캐공감일까? 그 사람을 사
랑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서의 자기만족을 사랑했다는 비유는 사랑에 대한 엄청난 냉소다. 인정하고
싶지 않다. 보통 어떤 사람을 잊어버리려고 노력할 때 그런 생각을 한다. 허나 그런 식이라면 세상에 사랑
은 없다. 아마 사랑을 가지고 인식론과 존재론의 영역까지 올라가서 토론을 해도 결론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냥, 사랑했을 뿐이다. 그 누군가를 사랑했다는 것 말고 뭐가 더 중요하단 말인가? 누군가의 사랑을 저런
식으로 재단한 사람은, 과연 사랑에 빠졌을 때 의연할 수 있을까? 유재원 교수님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그 사람은 언젠가 아프로디테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

 자신에게 고백한 사람에게 '당신은 내가 아니라 애인이 필요한 거예요'라는 대답은 고백한 사람에게 꽤나
큰 비수를 꽂는 것이 된다. 고백한 사람은 순수한 사랑이 아닌 섹스를 갈망하는 동물 취급을 받는 셈이다. 
(그러나 그런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고백받은 당사자이긴 하다.)

 공감은 냉엄한 현실로 바뀌고 저자에게 분노하려는 순간, 저자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며 이야기를 끝
낸다. 그 사랑은 직전의 냉소를 타파할 수 있는 순수한 사랑인지, 아니면 단지 새로운 사랑이라서 순수
하게 보이는 것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저 웃으면서 책을 덮었다가, '순교'부분만 되풀이해서 읽었다.

 EQ가 충만해서 기분좋을 타이밍에 삐끗하게 만든 역자후기도 짚고 넘어가자. 

상대를 환상적인 남자라고 생각하는 낭만적인 만남에서 시작해서, 어쩐지 점점 상대가 낯설게 느껴지고
대화가 통하지 않지만 여전히 사랑한다고 느끼는 기간을 거쳐, 자기자신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헤어짐을
선택하는 이별에 이르기까지, 알랭 드 보통은 사랑에 대한 남녀의 다른 심리를 꿰뚫어보며 이야기를 이
끌어간다.

역자 후기 중에서..







 ...나는 여자 해야되나?

 물론, 저자 역시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면에서 두 주인공을 설정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마도 공감을
좀 더 불러일으키려는 장치로 생각한다. 앨리스같은 남자는 생각보다 많다. 에릭같은 여자도 많으리라
예상한다.


 이 책의 내용이 '남자심리/여자심리'라는 제목으로 포장되어 싸이월드에서 펌질되지 않기를 바라며..

(글쓴 후 추가) 저런 저자 후기는 출판사의 압력이라는 가설이 들어왔는데, 이거 꽤 신빙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