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먹고, 불치병에 걸리고, 경제적으로도 힘들었던 인생의 마지막 시기에 베토벤은 왜, 자신이 '구두 수선공의 헝겊조각(cobbler's patch)'이라고 폄하했던 평이한 왈츠를 정교하고 방대한 변주곡들로 발전시키는 데 집착하게 된 것일까..."
클럽발코니의 이벤트에 당첨되어 우연한 기회에 가게 된 연극, 33개의 변주곡.
이 연극을 접하기 전까지는 베토벤이 말년에 변주곡을, 그것도 왈츠에 기반한 곡들을 33곡이나 썼다는 것을 전혀 몰랐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 흥미가 일었다. 관심 분야가 편협한 탓에, 난 기껏해야 피아노 소나타나 협주곡 아니면 유명한 교향곡들밖에 몰랐는데... 베토벤이 춤곡이라니, 머릿속에서 잘 매치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현장에서 연주를 라이브로 들으며 연극을 볼 수 있다기에 처음부터 잔뜩 기대를 했는데, 혹시나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크지 않을까 우려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기대를 안고 봐도 그 이상의 감동을 맛볼 수 있었던, 정말 훌륭한 연극이었다!
연극은 베토벤 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음악학자 캐서린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이미 청력을 잃어 가고 있었던 말년의 베토벤이 왜 보잘것없는 왈츠 하나에 집착하여 '디아벨리 왈츠에 의한 변주곡'을 무려 33곡이나 만들어낸 것인가 하는 의문과 맞닥뜨리게 된 캐서린. 루게릭 병을 앓고 있는 그녀는 이 수수께끼를 파헤치기 위해 딸 클라라의 만류를 뿌리치고 독일 본으로 날아가게 된다.
그곳에는 베토벤의 이야기뿐 아니라 캐서린과 클라라의 이야기, 나아가 내 자신과 주변의 이야기가 있었다.
죽어 가는 자신이 죽어 가던 베토벤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펼쳐지는 근본에 대한 물음. 그 속에서 다양한 진실들이 교차한다. 혼신의 힘을 다해 모든 것을 쏟는 열정과 더불어 굳어 가는 몸과 소중한 가치에 대한 자각, 치유되는 감정, 서로에 대한 이해, 점점 보이기 시작하는 삶의 의미. 베토벤의 집착에 투영시켜 생각했던 것은 다름 아닌 캐서린 본인의 집념이었을지도 모른다.
베토벤이 왜 변주곡을 33곡이나 썼는지 그 이유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그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누리는 것이다.
연극에서는 베토벤이 존재했던 19세기 오스트리아와 캐서린이 활동하는 21세기 독일을 번갈아 조명하며, 가볍지 않은 주제를 결코 무겁지만도 않게 풀어낸다. 모두의 이야기가 마치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듯한 기발한 연출, 벽면을 가득 메운 악보와 깔끔한 소품, 간간이 등장하는 배경 스크린은 관객으로 하여금 한껏 극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하나씩 흐르는 변주곡의 선율은 무대 배치가 바뀌는 암전의 순간까지도 긴장을 놓지 못하게끔 만든다. 베토벤을 잘 모르더라도, 아니 클래식을 잘 모르더라도 흠뻑 빠져들 수 있는 매력적인 작품이며, 그와 동시에 뭔가를 충분히 얻어 갈 수 있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정말로 놀라운 건 우리 귀와 눈이 가진 능력입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바로 '디아벨리 왈츠에 의한 변주곡'을 연주한 CD를 찾아 보았다. 내가 아는 연주자로는 폴리니와 아쉬케나지, 브렌델의 음반이 있었는데, 일전에 브렌델이 연주하는 베토벤 소나타에 감동을 받았던 나는 이번에 변주곡도 브렌델의 것으로 주문했다. 바가텔이 함께 들어 있는 2CD라 더욱 기대된다. 선율을 다시금 곱씹어 들으며, 베토벤이 왈츠 속에서 보았던 수많은 메시지들을 있는 그대로 느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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