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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생각상자

쓰기와 읽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 6.
쓰기와 읽기는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컨텐츠를 생산한다는 것과 컨텐츠를
소비한다는 점에서 천지차이다. 생산하는 기술의 차이가 있을 뿐, 이는 게임을 하는 것과 만
드는 것이 다름과 마찬가지다.

 쓰기와 읽기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쓰기를 자주 하다보면 읽기의 필요성을 체감하
게 되고, 읽기를 자주 하다보면 무언가를 쓰는 것이 매우 수월해진다. 이 관계에는 '사고'라는
매개체가 관여하게 된다. 내용의 이해 없이 옮겨적기만 하는 쓰기나 한 단락을 그 다음 단락과
연결지을 필요가 없는 읽기는 다른 한 쪽과의 긴밀한 연계가 없다.

 언제나 다가오는 요맘 때(?)에는 실제로 업무에 집중하는 시간과 관계없이, 온 정신이 일에
쏠려있어서 일과가 끝나고 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해야 할까..
그럴 때 가장 취약해지는 활동이 바로 쓰기와 읽기다. 행위가 취약해지는 만큼 그 매개인 사
고라도 실컷 해 보고자 한다.

쓰기
 고등학교 때 배우던 문학 교과서에서는 종종 글쓰기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수필이 나온다.
당장 외우고 공부할 것이 많았던 고등학생 때에는 저게 왠 호사냐...하면서 중요내용을 암기
하는 데에 바빴지만, 블로그를 시작한 이후 글을 쓰는 습관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
인지 알게 되었다. 

 별로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블로그에 쓰는 글은 나름대로의 물 관리(?)를 하는 편이라서,
일상을 적는다 해도 어떤 생각이 있지 않으면 쓰지 않는다는 허들이 있다. 그때문에 어쩌다
글 쓰는 감각을 잃으면 한동안 계속 글을 쓰지 못한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때다.)

 기자정신을 발휘하고자 하는 리뷰, 기행 글은 비교적 부담이 덜하다. 생각이 나지 않으면 
보고들은 내용을 채우는 것으로 허들을 넘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내 생각만으로 글을
쓰는 것은 상황에 따라 대차가 크다. 어떤 것을 주장하고 싶을 때야 줄줄줄 써 지고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지만, 어떤 생각을 쓰고싶은데 세부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글을
쓰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다. 글을 쓰는동안 계속 가설이 수정되기 때문이다.

 사랑을 하고 있을 때 사랑에 관련되지 않은 글을 쓰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블로그가 동
면에 들어갔을때는 보통 사랑을 하고 있을 때이다. 생각이 어릴 때는 사랑을 하는 동안 일도
글쓰기도 모두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과 글쓰기에도 사랑 못지않은 시간을 할애해야 함
을 느끼고, 어느 정도는 지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 안에 구축한 생각의 영역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사랑을 더 오래 지속시키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대학교는 자유로울 줄 알았으나 똑같이 시험이 있었다. 군대에서는
중간/기말고사는 없었지만 훈련이 있었다. 지금은 시험도 훈련도 없지만 데드라인이 있다.
데드라인이 다가오는 시기에는 글쓰기를 시작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고'가 정지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고를 하기보다는 만들어진 컨텐츠(학생 땐 암기된 지식, 군대 때는 준비된 훈련물자)
에 한 치의 오차도 없도록 준비하는 기술이 더 중요해지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그럴 때 더
빛나는 사고를 하는 사람, 나아가서 쓰기까지 하는 사람이 진정한 프로페셔널이 아닌가 싶지만,
나는 아직 좀 모자란 듯 하다.

읽기
 대학교 때부터 직장까지 항상 긴 통학(통근)시간을 필연적으로 겪은 나는, 먼 길을 가느라
무언가를 오래 타고 있는데 아무것도 없는 시간을 매우 두려워한다. 잠이 오지 않으면 그건
그야말로 지옥이다. 그래서 항상 가방에는 음악/게임기/책의 3가지가 함께 들어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이 킬링타임 3종세트는 항상 경합을 벌이지만 결국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보여준다.

 1. 일반적으로 책보다는 게임이 선택되고, 음악보다는 책이 선택된다. 

 2. 졸리면 음악이 압도적으로 우세해지나, 졸림의 강도가 약하면 게임기가 선택될 경우도
    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졸리면 책은 절대 선택되지 않는다. 

 3. 졸려서 눈을 감고 음악을 들어도 잠이 오지 않을 때에는 책이 선택된다. 그러나 책을 펴고
    1페이지 이내로 잠들었기 때문에 과연 책이 선택되었다고 볼 수 있을지는 조금 의문이다.
 
 4. 재미있는 책과 질려가는 게임을 굴리는 도중이라면 게임기보다 책이 선택될 경우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재미있는 책을 읽고 있어도 목적지까지 가는 시간의 최소 20%는 게임에 할
    애된다.

 위의 결과들은 모두 MP3P와 PSP, 책 사이에서 벌어진 일들을 토대로 한 것이다. 그런데 PS
P에서 커펌을 돌린 이후 점점 책이 우세해지고, MP3P를 잃어버린 후에는 PSP안에서 메모리
공간을 두고 게임과 음악의 경합이 벌어졌다. 급기야는 그냥 책만 갖고다니는 상황이 되어, 
근 1년간은 책을 많이 읽었다.

 남경태씨의 '역사'를 다 읽은 후 마땅히 땡기는 책이 없고, 시기가 시기인지라 도움을 얻기위해
라프 코스터의 재미 이론을 가방에 넣어 다니고 있다. 쓰기와 마찬가지로 읽기 역시 한번 감을
잃으면 한동안 되찾기 힘든지라, 텍스트를 읽고자 하는 욕구가 솟구치는 요즘이다.

 음 그런데, 최근 NDSL을 구입해서 PSP대신 들고다니게 된 이후, 책을 언제 읽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기 시작했다. DS는 위의 법칙을 모두 무시하고 무조건 선택되고 있다. 위험하다. 그래서
난 이미 동숲 스샷을 찍고 있고, 내일도 지하철에서 재미이론 대신 젤다의 전설을 택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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