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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설, 에세이

[책] 뜬구름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4. 3.



 나는 소설을 그다지 읽지 않는다. 소설이란 어차피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라는 생각에서
인데, 무지가 낳은 방만함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생각 때문에 집중을 하다가도 이내 다른 생각을 해
버리기 일쑤이고, 10권 이상으로 된 장편소설은 엄두도 못 낸다.

 전공학점을 채우느라 일본소설문학 수업을 신청했는데, 수업을 빠지기로 했으니 틈나는 대로 책들
이나 읽어보자..하는 생각에 집어든 첫 책. '상실의 시대' 는 그럭저럭 읽을 만 했지만 '해변의 카프카'
는 무슨 이야기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던 나에게 일본 문학이란 '그저 허무한 것'이였다. 근대 문학이
라면 고등학교 때 배웠던 몇몇 소설 정도. 그래서 이 책은 '허무하고 지루한 것'으로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다. (전공생 맞냐;)

 이야기하듯이 풀어내는 문체나 술술 넘어가는 점도 그랬지만, 점점 책을 놓지 못하게 된 것은 이야기
를 통해 드러나는 분조의 심리가 마치 내 거울을 보는 듯 했기 때문이였다. 냉소적인 시각으로 바라보
면 그저 '꽉 막힌 사람'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런 심정이 너무나 이해가 갔다.
 꽉 막혀서 사고가 좁아지기까지의 과정이나 그 모습, 후에 그것을 되돌아보며 지진희에서벗어나는
소하며 자기합리화(?)를 하는 모습, 그러면서도 헛된 망상(=희망?)을 자주 품는  모습까지...그러다 보
니 3인칭으로 서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간 쯤 가서는 몰입해서 내가 분조인지 분조가 나인지 모를
정도가 되었다. 사랑에 관해서라면 누구나 이렇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고등학교 때 배웠던 김유정의 '봄봄'은 '여자 마음은 정말 알 수 없는 것'으로 그리고 있지만 이쪽은 좀
다르다. 초반에는 주인공인 분조의 감정이 주로 그려지고, 나머지 인물들은 한 발치 물러서서 바라보기
때문에 분조 혼자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중반 이후에는 나머지 인물들의 감정이나 심리 상태를 다
풀어놓아서 앞의 일들이 왜 그랬는지 짜맞춰짐과 동시에, 이들이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그려낼 지를 계
속 궁금하게 한다. 화자는 마치 영사기 앞의 변사처럼 인물들의 속내를 맛깔스럽게 그려내는데 그 표현
이 기가 막힌다. 그 문체를 살리려고 고심한 흔적이 번역문에서 엿보인다.

 일본 근대소설로의 출발은 좋았다. 일본 문학에 리얼리즘을 창시한 작품이라고는 하나 내용 전개나 필
체나 '일본 근대소설은 이런 것이다' 라고 대표할 만한 작품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빠져들어 읽는 소설
특유의 재미를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앞으로 읽을 것들에 대한 기대치 역시 올라갔다. 다른
책들을 더 읽어보면서 한 학기를 보내면 문학과 좀 더 친해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