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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설, 에세이

[책] 황석영의 '손님' 서평

두릅이 2005. 12. 19. 13:36

 내가 뭐 서평을 쓸 만치 문학적 소양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데올로기 문제를 논할만치 정치적 소양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수업 과제이기 때문에 읽고 서평까지 난생 처음 쓰게 된 것일 뿐. 
 그런데 이 책, 그냥 나만 보아넘길만한 책이 아니였다. 저자의 특이한 이력은 둘째치더라도 이야기의 전개 방법과 그 구조의 치밀함이 거의 와우의 퀘스트(쌩뚱맞은 비유인가--;) 또 소설을 읽다가 그 참혹함에 눈을 감았던 경험을 하게 한 것 역시 이 책이 처음이였다. 내가 쓴 서평 역시 이 문체에 관련된 것이고, 스포일러...아니 거의 내용을 대략 다 포함하고 있으니 이 책을 읽어보고 싶은 분은 도서관에 가서 빌려보면 될 것이다. 민족의 수난사를 그린 다른 작품은 많지만 이와 같은 처절한 감동을 주는 작품은 처음이였다.

              

  

 


 


             


‘손님’ - 양분된 이데올로기가 우리 현대사에 빚어낸 참극

 

 나는 이 책을 두 번에 나누어 읽었다. 류요한이 죽고 나서 그 동생 류요섭 목사가 그의 유골을 지니고 고향 방문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다른 일이 생겨 책을 잠시 손에서 놓게 됐다.  그때까지는 미국에 사는 이북 출신 목사가 고향을 방문하는 평이한 내용과 중간의 회상에서 생겨나는 약간의 궁금증이 있을 뿐 그다지 큰 관심을 가지지는 않고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 반 억지로 읽었던 근대 단편소설을 보는 듯한 문체와 모든 대화가 이북 사투리로 이어지는 내용 전개에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책을 펴고 과거로 시간여행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었다. 또한 북한에 대한 자세한 묘사보다도 훨씬 더 사실같이 묘사해낸 과거의 비극들은 내 가슴속에 깊이 사무치기에 이르렀다..

  

 

 재미 교포 목사인 류요섭은 오랜만에 형 류요한 장로를 찾아가서 고향을 방문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린다. 그날 밤 요한은 반세기 전에 있었던 일들을 잠시 회상하게 되고, 지난 일들을 용서받으라는 요섭의 말에 벌컥 화를 내고 만다. 그리고 그는 그날 밤 이전에 자신과 관련이 있었던 사람들의 유령을 만나고, 운명을 달리하게 된다.

 초반 전개에서 인물들이 이북 출신으로 황해도가 고향이고 오래전에 미국으로 건너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이북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이 왜 미국에 와서 목사가 되고 장로를 하면서 살고 있는지 약간 의아했다. 류요한은 자신의 나타나는 영혼들을 보고 그가 오래전 그때 그들에게 한 무언가를 잠깐씩 회상한다. 하지만 오래전의 사건과 영혼이 되어 나타나는 인물들을 묘사할 뿐 그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기 때문에 궁금증이 생겨난다. 더구나 꽤나 가까운 사이였는데 나중에는 철사에 코를 꿴다거나 피범벅이 된 머리에 총을 쏘거나 하는 행동에서 그곳에서 과거 어떤 비극이 있었음을 암시하지만, 그 이상의 정보는 없으므로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갈 뿐이다.

 

 

  요한은 형의 장례를 치르고 고향 방문단으로서 먼저 평양을 방문하게 되는데 그 전에 형과 알았던 박명선 할머니를 찾아가서 이야기를 하지만 그녀는 아무 생각도 기억하기 싫다고 한다. 명선의 회상 속에서 그녀의 식구들이 몰살당했던 날의 일이 되살아나고, 그날 밤 요한이 나타나 자신이 명선의 식구들을 모두 죽였다고 고백한다. 앞서 나온 사건에 이어 궁금증을 또다시 가중시키는 부분이다. 죄를 씻으라는 요섭의 말에 요한은 애써 회피한다.

 중간에 삽입되는 요한의 회상에서 그들 집안이 기독교 집안이 된 내력과 요섭, 요한 형제의 이름에 대한 내력이 확실히 드러나고, 이어서 일제시대와 해방에 이르러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뿌리내린 내력을 몇 가지의 역사적 사건과 일화의 자세한 묘사를 통해 나타내고 있다.

 

 

 평양을 방문한 요한은 자신이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것처럼 느끼고 곧이어 그의 앞에도 전에 요한 앞에 나타났던 순남이 아저씨의 혼령이 나타나게 된다. 요섭이 평양을 방문하는 부분에서 평양의 모습을 자세하게 묘사해 놓았는데, 작가가 방북했던 시절에 보고 듣고 느끼던 것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부분부터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인 한 사건을 여러 인물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묘사가 시작된다. 작가가 후문에 밝혔듯이 과거의 리얼리즘보다 더욱 풍부하게 해체하고 재구성하기 위하여 인물 각자의 시점에 따라 서로를 교차시켜 그려낸 것이다. 고등학교 때 배웠던 1인칭, 3인칭의 형식 따위는 이 소설에서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과거의 ‘그 사건들’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등장인물들의 회상은 아직은 우리에게 그런 치밀한 사건 구조를  전달해 주지 못한다. 더욱 더 궁금하게 만들 뿐이였다.

 

 

 고향 신천을 방문하게 된 류요섭 목사는 박물관에서 과거 그곳에서 일어났던 양민 학살 현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듣고 그 현장을 보존해둔 현장에 가게 된다. 살아남은 증인들은 당시의 참극을 생생히 기억하고, 증언하고 있었다. 류요섭 목사에겐 그것이 커다란 충격은 아니였을 것이다. 자신이 어린 시절 실제로 보고 겪은 일이였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뉴스에서 노근리 학살 사건 등의 진상 규명조사와 진위 여부에 대한 약간의 언론 보도만 보았던 나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전쟁이란 인간을 이리도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인가?

 류요섭 목사는 드디어 자신의 고향인 신천에 다다르게 되고 그곳에서 형 요한의 아들 단열과 만나게 된다. 단열은 아버지의 행적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좌익활동을 했던 사람들의 자녀들이 그랬듯 성장 과정에 큰 어려움을 겪었고 그 때문에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었다. 요섭은 단열에게 요한의 골편을 쥐어주고, 조카와 함께 목욕을 한 후 잠이 드는데, 그날은 요한과 순남이 아저씨가 같이 나타났다. 그리고 둘은 서로의 입장을 요섭에게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들은 해방이후 큰 혼란을 겪는 우리 사회와 북으로의 소련군의 주둔, 그리고 사회주의 사상이 북쪽에 뿌리내리고 기존의 지주 세력과 새로운 혁명 세력과의 갈등을 서로의 입장에서 차분히  풀어낸다. 토착 지주 세력은 새로운 혁명 세력이 된 그들의 소작인에게 숙청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혁명 세력은 그 때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아니 알 수 없었던 새로운 사상에 눈을 떠가고 그에 입각해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려 하던 시기였다.

 요한이 기독교를 믿는 토착 지주세력을 대변한다면 순남이 아저씨는 구한말과 조선 시대의 피지배층이 사회주의를 바탕으로 혁명을 일으킨 입장을 대변한다. 앞서 언급한 여러 인물 관점에서의 묘사는 이 부분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이념과 사상이 걸린 그런 중요한 가치 판단을 한 사람의 입장에서 서술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한 명의 주인공으로는 절대 풀어낼 수 없는 이야기다. 두 번에 걸쳐 양 쪽을 오가며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 우리는 양 쪽의 입장을 모두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또다시 나타난 요한은 이번엔 찬샘골에 묻어달라는 말을 한다. 자신의 죄를 그저 회피하고 살아왔고, 죽어서도 같은 입장을 취하던 요한이 달라진 것이다. 이튿날 요섭은 단열의 집으로 가서 요한의 처를 만나게 된다. 요섭에게서 받은 요한의 골편을 보고 오열하는 그녀는 단열과 마찬가지로 요한이 벌인 일 때문에 십수년간 고생이 많았지만 단열처럼 무조건 그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가 지은 죄에 대해서는 그녀도 잊지 않고 있었다. 단열과 함께 요한의 제사를 지내고, 요섭을 떠나보낸다. 그리고 그녀는 단열을 낳을 때를 회상한다.

 다음날 요섭은 사리원의 삼촌을 찾아가게 된다. 삼촌은 당원이 되어 농장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날 저녁 삼촌과 함께 술자리를 하게 된 요섭은 요한 얘기를 꺼내는데, 삼촌 역시 요한과 죽은 사람들의 혼령을 보았다고 한다. 이야기를 마친 후 방에 들어가는 삼촌은 해방 시절부터 인민군이 이북을 지배할 때까지의 일을 회상하기 시작한다.

  삼촌의 회상은 다시 해방 직후로 돌아가서 앞서 요한과 순남이 아저씨가 이야기했던 상황을 제3자의 중립적 입장에서 이야기한다. 그는 충실한 교인이였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한 지주 세력도 아니였고 부역에 끌려가서도 한마디 불평 없이 일을 하면서도 혁명에 참여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순남이 아저씨와 오래 전부터 절친한 사이이면서도 통일단 사건으로 사로잡힌 상호를 살려주기도 한다. 그 때문에 그는 강제 부역에 끌려가서도 교인으로 살았고, 당원에 이름이 오르고도 청년단의 숙청에서 살아남았다. 그는 그 아픔의 세월을 그저 가슴속에 묻어두고 묵묵히 살아갈 수 있었고, 영문도 모른 채 비슷한 아픔을 겪은 대다수인 우리내 민중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날 밤, 요섭은 요한의 혼령이 부르는 소리에 눈을 뜬다. 요한이 데리고 간 곳에는 순남이 아저씨의 혼령이 삼촌을 불러내 오고 있었고, 죽은 마을 사람들의 혼령도 모두 모여 있었다. 모든 것이 밝혀질 때가, 모든 죄가 사해질 때가 온 것이다.

 우파인 기독교 청년단은 나름대로 무기를 조달하고 부대를 조직한 후, 전쟁이 일어나 정규군이 마을에서 자리를 비운 사이를 틈타 신천 옆마을 재령부터 다시 점거하고 혁명 세력,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에게 반기를 든 소작인들을 숙청한다. 무차별한 살육의 시작이였다. 물론 그들은 자신의 입장을 견지하고 하느님의 뜻을 받드는 십자군적인 정신을 바탕으로 한 것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십자군의 마지막이 그랬듯, 그들 역시 광폭화되고 무차별적이 되어갔다.

 신천의 청년들은 그 움직임이 조금 늦었기 때문에 오히려 후퇴하다가 되돌아온 인민 정규군의 재숙청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인민 정규군은 한국군과 미군에 추격당하던 때였기 때문에 숙청을 끝낸 후 다시 후퇴했고, 숨어있던 신천의 기독교 청년들은 반격을 시작한다.

 찬샘골 지역의 임무를 담당한 요한은 일랑이와 순남이 아저씨를 끌고 나온다. 서서히 초반에 궁금증을 일으켰던 사건이 하나둘씩 그 매듭을 풀어 나가기 시작한다. 복수의 분노와 잔인함은 굴러가는 눈덩이처럼 한없이 커져서 그 숙청의 강도는 처음 혁명 세력의 탄압에 비하면 너무나 끔찍한 것이였다.

 요한은 순남이 아저씨와 일랑이를 죽이지만 그들의 마지막을 보면서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기 시작한다. 그들은 그들의 자유 의지라기 보다는 사람답게 살아보고 싶어 한 행동들이였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기독교도 아닌 토착 ‘지배’ 세력인 봉수의 만행은 도를 넘기 시작하고 미군이 들어올 때에 이르러 앞서 요섭이 들렀던 기념관에서 본 학살 현장이 그대로 재현된다.

 삼촌의 회상 부분이 나온 이후 별 준비없이 받아들인 이야기의 실마리는 너무나 거대한 것이였다. 작가는 정들었던 사람들이 서로 죽이는 비극적인 상황과 비인간적인 공개 처형이나 집단 학살 등의 참혹한 장면을 하나도 숨기지 않고 낱낱이 풀어 나간다. 너무 침착하고 생생해서 느껴지는 비극성은 강도를 더한다. 서두에 밝힌 사진보다도 더 참혹하다는 말은 바로 이 부분에서 비롯된 것이였다. 인간을 죽음에 굴하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종교와 사상이지만 그것은 자신과 사상이 다른 인간을 이렇게도 쉽게 죽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사상의 충돌이 낳은 결과는 이리도 비참한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에 그치지 않는다. 요섭이 우연히 만나게 된 인민군 자매와의 이야기가 추가된다. 더구나 그들은 음악을 하고 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저항의 상징인 악기는 그들 역시 전쟁에 희생된 불쌍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도구로서 부족함이 없다. 요섭이 그들의 노래를 듣는 장면은 작품에서 계속 이어져 온 갈등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그 불안한 평화도 오래가지 못한다. 요한에게 발견된 자매는 노래로서 최후의 저항을 해보지만 무참히 짓밟힌다. 그리고 나서 찾아간 요한의 누이는 상호에게 처형당한 상태였다. 분노에 가득차서 되돌아간 요한이 본 것은 남몰래 흠모했던 윤선생이 그의 동료들에게 윤간을 당하는 모습이였다. 그녀를 쏘아버리고, 상호를 죽이는 것이 아닌, 상호와 미래를 약속한 명선의 식구들을 전부 죽임으로서 상호에게 똑같이 복수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시점부터 영원히 고향에 있어 손님일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초반부터 제기된 의문들은 전부 비로소 전부 풀린다.


 


 중반에 양 세력의 입장을 충분히 대변해 주었던 각 인물 관점에서의 서술은 마지막의 이야기 전개에서 이 소설의 백미임을 증명한다. 초반부터 궁금증을 남기는 여러 사건을 여러 인물의 시점에서 보여주면서 추리 소설의 결론 제시 부분을 보는 듯한 사건의 연계성. 그와 어우러지며 더욱 고조되는 비극성은 가슴속 깊이 사무친다. 책을 다 읽은 후에 다시 앞부분으로 돌아가서 책을 들추어 보면 추리 소설에서 탐정이 범인이 했던 일의 증거와 이유를 낱낱이 집어내듯이 모든 사건들을 똑같이 찾아낼 수 있다. 그 부분에서 처음 읽을 때는 영문을 몰랐던 사건들이 마지막의 핵심 전개 내용을 군데군데 배치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소름이 쫙 돋는 기분이였다.

 

 

 

 일제의 강점기,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쳐 온 민족의 수난사를 그린 작품은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작품을 쓰는 입장을 한 쪽으로 고착화한 사람들(그것이 인물의 관점이든 사상이든)의 작품은 동질성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뿐 ‘손님’처럼 민족의 참상 그 자체를 남북으로 아우르며 접근하지는 못한 것 같다.

         

 

             


                           내가 고등학교때 배웠던 역사 교과서에 나타난 구월산, 신천 사건. ‘손님’에 나타난

                       참혹한 과정들을 ‘의거’라고 표현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였겠지만..


 6.25 전쟁을 가장 거대한 자본으로 연출과 규모 면에서 사실성 있게 그려낸 영화‘태극기 휘날리며’에서도 ‘손님’에서와 같은 이데올로기 갈등이 잠깐 등장한다. 하지만 전체적인 영화의 흐름에 여주인공이 죽는 비극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로 이데올로기가 쓰였고, 전쟁의 참혹성을 보여주는 시각적으로만 비추는 데에 그친 이 영화에 비해 손님은 이데올로기의 갈등이 우리 현대사에 이식되어 벌어지는 사건들을 통해 전쟁뿐만 아니라 대체 그 갈등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냐고 묻게 한다. 모두를 손님으로 만들 수밖에 없는 그 갈등 말이다.

 '손님‘이라는 한 작품을 읽음으로서 한국전쟁 전후의 사상 유입과 그 갈등의 배경을 한번에 알 수가 있다. 작가의 서술 기법 또한 리얼리티를 최대한 살리려 한 본래의 의도 말고도 읽으면서 궁금증을 얻고 그것을 풀어가는 ’또 다른 읽는 재미‘를 가져다주었다. 작가가 그를 위해서 한 사건을 가지고 치밀하게 구성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인 것이 작품 안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손님‘ 은 영화화하기 굉장히 힘들 것이고 영화화되어서도 안된다. 오직 황석영의 문체와 묘사만이 그 정서를 완벽하게 반영할 수 있다. 또한 그 때문에 이 책을 이 시대상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도 마음놓고 추천할 수 있다. 전쟁을 거치며 대립한 이데올로기를 통해 생겨난 근대사의 또다른 아픔을 처절하게 느껴보고 싶다면 바로 이 책을 읽어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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