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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생각상자

사춘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2. 16.
 1997년은 내게 꽤 의미있는 해다. 바로 이맘 때인 2월만 해도 세뱃돈으로 손에 넣은 FF7을 들고 그저
좋아라 하던 시절. 길 가다가 나를 불러세운 친구녀석이 '옷이 그게 뭐냐?' 하고 물어서 내 차림을 살펴
보니 어머니가 어디선가 얻어다 주신 디스코 스타일-_- 청바지. 지금 생각하면 대체 어떻게 그러고 다녔
는지 갸우뚱해지만 그 때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뭐가 문제인지 몰랐다.

 중3이 되면서 6학년때 친했던 친구 녀석과 같은 반이 됐다. 우리집에 놀러왔을 때 같이 졸업앨범을 보
는데, 사실은 얘를 좋아했네 어쩌네 하면서 낄낄대던 중에, 6학년때는 말하지 않았던, 내가 좋아했던 애
를 가리켰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친구녀석이.

 "음? 얘 우리학원 다니는데...야 근데 얘가 뭐가 이쁘냐? 너 진짜 얘 좋아했어?"

 "......(좋아했다 이자식아)"

 어쨌든 나는 길게 생각 안하고 다음날 그 학원에 등록하러 갔다. 학원엘 가니 중간고사 점수를 물어본다.
내 성적을 말했더니 너는 C반이란다. (참고로 친구 녀석과 그 애는 A반이였다.) 언제나 성적이 중간은
갔던지라 C반에서는 탑 클래스-_- 였는데, 이상하게 한달 두달이 지나도 A반은 커녕 B반도 못 올라갔다.
어쨌든 학원에 다니며 가끔씩 그 애와 스쳐지나가는 게 내 낙이였고, 6학년때 좋아하던 것과는 뭔가 다른
감정이 꿈틀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누워서 그 애 생각이 나면 온갖 망상을 펼치다가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학원에 가기 전에 거울을 보게 됐고, 뭘 입고 나갈까 고민하고, 2월에 친구를 놀래킨 디스코 바지는 버린
지 오래였다. 연예인이나 가요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인터넷에서 RA로 '애송이의 사랑'을 들은 후 테이프를
사고, 그 애를 생각하며  매일매일 듣고 흥얼거렸다. 노래도 좋았지만, TV에서 본 양파는 너무 귀여워 보였다.
연예인을 좋아했던 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였나 생각되는데.. 어쨌든 나는 변하기 시작했다. 사춘기가
시작된 것이다.

 에뮬 게임을 하려고 PC통신이라는 것을 시작했지만, FF7에 실망했던 나에겐 이미 게임 불감증이 찾아
오기 시작했을 때였다. PS를 팔고 N64를 했다가 또다시 팔고는 삐삐를 샀다. (응?)

 학교가 끝나면 통신에 들어가서 학원가기 전까지 채팅을 하는 것이 내 일과였다. 인터넷이 퍼지기 전에
있었던 통신의 채팅은 확실히 뭔가가 있었다. 하는 이야기야 연예인/가수 이야기, 학교 이야기, 깔(그때는
이게 여친/남친을 가리키는 말이였다) 이야기 뿐이였지만, 학교에서의 친구들과 통신에서의 친구들은
이야기하는 느낌이 뭔가 많이 달랐다. 그러면서 내 관심사는 게임에서 점점 멀어져 갔고, 급기야는 수능
끝날때까지 콘솔 게임을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비디오 게임의 르네상스였던 시기에 말이다.)

 학원을 다니는 1년 동안 그 애 주위를 빙빙 돌고, 여름 특강때 같은반이 됐을 때 온갖 오바를 하면서 '냐아
나'를 어필했지만, 결국 말 한번 걸지 못하고 중학교를 졸업했다. 수능이 끝난 후 동창회에서 만났을 때, 은
근슬쩍 물어봤다.

 "너 혹시 중3때 XX학원 다니지 않았냐!?"
 "응 다녔어. 왜?"
 "맞지? 나도 그 학원 다녔는데, 혹시 나 본적 있지 않냐?"(능청)
 "아니? 너 거기 다녔어?"
 ".....(1년동안 너 보러 다녔다.)"


 채팅에서 알게 된 애들이랑 벙개도 하고, 펜팔하느라 편지도 참 많이 썼는데, 그 때 편지를 가장 많이 주고
받았던 두 명중 한명이 작년 내내 포스팅 거리(?)가 됐던'지인'이였고, 나머지 한 명은 지금도 가끔 만나는
친구가 됐다. 그게 벌써 10년이라니..사실은 그저 학원다니고 집에서 채팅을 자주 했던, 지극히 평범한 일상
이였지만, 무언가 가능성을 가진, 설레임이 있던 1997년이였다.

 IMF를 다시 맞고, 수능을 다시 보고, 군대를 다시 가라고 해도 1997년으로 돌아가라면 돌아가고 싶다. 필자
수업을 받을 때는 게임을 거의 하지 않았던 3년이 아까웠고, 지금은 게임 만드는 데에 파고들지 않았던 것이
후회스럽긴 하지만, 1997년은 나에게 감성을 가져다 준 해였다. 지금은 이렇게 야밤에 궁상 떠는 데 한몫하고
있지만, 가끔씩은 생각에 젖고 젖어 눈물을 흘릴 수도 있는, 뜨거운 가슴을 가져다 준 1997년에게 감사한다.

                            97~98년의 추억들..

PS. 양파 신보 언제나와........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