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설을 그다지 읽지 않는다. 소설이란 어차피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라는 생각에서
인데, 무지가 낳은 방만함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생각 때문에 집중을 하다가도 이내 다른 생각을 해
버리기 일쑤이고, 10권 이상으로 된 장편소설은 엄두도 못 낸다.
전공학점을 채우느라 일본소설문학 수업을 신청했는데, 수업을 빠지기로 했으니 틈나는 대로 책들
이나 읽어보자..하는 생각에 집어든 첫 책. '상실의 시대' 는 그럭저럭 읽을 만 했지만 '해변의 카프카'
는 무슨 이야기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던 나에게 일본 문학이란 '그저 허무한 것'이였다. 근대 문학이
라면 고등학교 때 배웠던 몇몇 소설 정도. 그래서 이 책은 '허무하고 지루한 것'으로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다. (전공생 맞냐;)
이야기하듯이 풀어내는 문체나 술술 넘어가는 점도 그랬지만, 점점 책을 놓지 못하게 된 것은 이야기
를 통해 드러나는 분조의 심리가 마치 내 거울을 보는 듯 했기 때문이였다. 냉소적인 시각으로 바라보
면 그저 '꽉 막힌 사람'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런 심정이 너무나 이해가 갔다.
꽉 막혀서 사고가 좁아지기까지의 과정이나 그 모습, 후에 그것을 되돌아보며
소하며 자기합리화(?)를 하는 모습, 그러면서도 헛된 망상(=희망?)을 자주 품는 모습까지...그러다 보
니 3인칭으로 서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간 쯤 가서는 몰입해서 내가 분조인지 분조가 나인지 모를
정도가 되었다. 사랑에 관해서라면 누구나 이렇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고등학교 때 배웠던 김유정의 '봄봄'은 '여자 마음은 정말 알 수 없는 것'으로 그리고 있지만 이쪽은 좀
다르다. 초반에는 주인공인 분조의 감정이 주로 그려지고, 나머지 인물들은 한 발치 물러서서 바라보기
때문에 분조 혼자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중반 이후에는 나머지 인물들의 감정이나 심리 상태를 다
풀어놓아서 앞의 일들이 왜 그랬는지 짜맞춰짐과 동시에, 이들이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그려낼 지를 계
속 궁금하게 한다. 화자는 마치 영사기 앞의 변사처럼 인물들의 속내를 맛깔스럽게 그려내는데 그 표현
이 기가 막힌다. 그 문체를 살리려고 고심한 흔적이 번역문에서 엿보인다.
일본 근대소설로의 출발은 좋았다. 일본 문학에 리얼리즘을 창시한 작품이라고는 하나 내용 전개나 필
체나 '일본 근대소설은 이런 것이다' 라고 대표할 만한 작품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빠져들어 읽는 소설
특유의 재미를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앞으로 읽을 것들에 대한 기대치 역시 올라갔다. 다른
책들을 더 읽어보면서 한 학기를 보내면 문학과 좀 더 친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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