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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설, 에세이

아리카와 히로, <植物図鑑(식물도감)>

by 일본맛탕 2013. 1. 27.


식물도감(植物図鑑) - 아리카와 히로(有川浩) 저


지난번에 도쿄에 갔을 때 서점가를 서성이다가 말랑한 소설책이 읽고 싶어서 집은 책.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매대에 진열된 책만 보고 골랐다. 소설답지 않게 '식물도감'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게 신선했고, 연애 소설을 표방하고는 있지만 이름에 걸맞게 왠지 잔잔한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아서 반대로 두근거렸다. 그리고 이 예감은 적중했다.


바로 읽지는 못하고 있다가 곧 다시 오사카로 떠나게 되었는데, 무심코 가방에 넣었던 것을 공항 가는 길에 꺼내 읽었다.


읽다가 덮으면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책은 참 오랜만에 읽어 보는 것 같다. 여행지에 가서도 아무리 지쳐도 자기 전 숙소에서나 이동 중에 꼬박꼬박 읽었고, 결국 한국으로 돌아오기도 전에 다 읽어 버렸다.


내용을 한마디로 압축하자면 '일하는 현대 여성의 판타지' 정도가 아닐까? 남자 주인공 이츠키는 '여자가 자신의 희망을 가득 담아 만든 남자 캐릭터'라는 인상이 강하게 남는 판타지 속 캐릭터 같았고(세상에 이런 남자는 절대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 반대로 여자 주인공 사야카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캐릭터였다. 무의식 중에 '나'와 동일시하게 되는.


후기에 따르면 작가는 선녀와 나무꾼처럼 하늘에서 여자가 뚝 떨어지는 판타지의 반대 버전(그러니까, 괜찮은 남자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을 생각하며 이런 스토리를 쓰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미 '너는 펫'이나 '오히토리사마' 같은 드라마가 몇 년도 더 전에 크게 히트친 마당에 새삼 새로울 게 없는 소재가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기존의 '일하는 여자와 잘생긴 남자(게다가 요리도 잘하는)의 동거 스토리'라는 뻔한 전개에서 차별화를 꾀할 수 있었던 것은 '야생초'라는 새로운 소재를 접목시켜서 잔잔하면서도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풀어 냈다는 점이다. 간간이 이게 연애소설인지 요리책인지(?) 알 수 없다는 불평을 하는 독자들도 있다지만, 나는 오히려 이런 면이 이 책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너무 격한 전개로 치달았다면 그냥 진부한 짝퉁 삼류 소설로 끝나지 않았을지. 잔잔히 흘러가는 일상 속에 내 마음이 어떤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아 수줍게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는 모습, 나와 상대의 마음을 저울로 매달아 보며 불안해하는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쁘고 행복할 때는 그것을 마음껏 표출하는 모습. 읽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중반 이후부터는 약간 김이 새는 부분도 있었다. 뿌려 놓은 수많은 떡밥들을 너무 한꺼번에 매끄럽게 회수해 버려서 약간 황당했달까. 하지만 작가도 이를 간파했는지 끝에 가서 멋지게 낚시를 해 주기 때문에 마지막 장까지 다 읽었을 때는 만족하며 책장을 덮었다.


한국에도 출간된 줄 모르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사랑도감>이라는 제목으로 2012년 5월에 출간된 모양이다. <사랑도감>이라... 책 내용을 생각하면 결국엔 적절한 제목이긴 하지만, 일단 이 제목을 통해 이 책을 처음 접한 독자는 잔잔함 이상의 그 무언가를 바랄 것 같고, 게다가 표지가 그야말로 달달한 연애소설스러워서 웬만한 용기로는 선뜻 집기가 어렵지 않을까 싶다. 정작 책 내용은 그렇게 격렬한 연애 소설이 아닌데...


작가의 이름만 봤을 때는 남자인 줄 알고 '어떻게 남자가 이런 감성으로 글을 쓰지?' 하고 의아해했는데, 알고 보니 여자였다. (위에도 썼지만, 남자 주인공인 이츠키가 너무나도 '여자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캐릭터' 같았기 때문)


그리고 두릅이가 작가 약력을 보더니 "어, 도서관 전쟁 쓴 사람이네? 그거 라이트노벨이었을걸?" 하고 힌트를 주었다. 어쩐지 문체가 일반 소설 같지 않게 약간 가볍고 구어가 섞여 있어서 읽기가 편했다. 작가의 다른 책들도 궁금해진다.



출국 전 김포공항. 식물도감에다가 식물 책갈피를 꽂으니 귀여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