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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인문

[책] 고우영의 초한지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4. 26.

 고등학교 때 내가 존경했던 국사 선생님이 있는데, 항상 대학교에 가면 중국 고전을 꼭 읽으라고
신신 당부하셨다. 삼국지, 수호지, 초한지, 영웅문 등등..그러나 책과 담쌓고 있던 나에게 무슨 소
용 있으리..1억권 넘게 찍어낸 이문열의 삼국지는 너무 길고, 수호지는 어렸을 때 동화책으로 봤
을 때도 그다지 재미 없었다. 영웅호걸의 나열에 그칠 뿐..초한지는 항우와 유방 이야기라는 것을
안 것도 먼 훗날의 일이니..그야말로 나는 무지랭이였다. 군대에 가서야 '항우와 유방'이라는 제목
으 로 된 책을 한권 읽은 정도였다.

 작년에야 학교 도서관에 고우영 옹의 전집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삼국지를 한 권 읽자마자 완
전히 빠져들었다. 구수한 그림체와 그 속에 스며있는 기지와 해학은 물론이거니와, 동서고금을 두
루 섭렵하는 박식함에 탄복할 지경이다. 만화책이 책 좀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수도 있다.  

 삼국지와 수호지는 원전을 읽을 때와 느낌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고우영식 재해석이 워낙
즐거워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열국지는 생소한 나라들이 일어나고 무너지는 과정이 계속
반복되서 약간 정신이 혼미했던 것이 사실이였다. 열국지의 마지막에 진나라가 건국되고 그에 이
어 초한지의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초한지에는 확실히 드라마틱한 무언가가 있다. 

 초와 한으로 명확하게 갈리는 두 진영, 완전히 대비되는 두 영웅의 성격, 비교적 직선적인 이야기
구조에도 불구하고 몰입도는 다른 고전들보다 훨씬 높다. 언제나 알면서 속는 트렌디 드라마를 볼
때의 느낌이랄까? 처음부터 결말을 뻔히 알고 있는데도 이야기에 계속 빠져들며, 다른 작품들에 
비해 캐릭터들에 대한 기억도 뚜렷이 남아있는 편이였다.

 다만 이 쪽은 고우영식 해석이 좀 과한 것이 아니였는지, 유방의 호걸적인 면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거의 개그 캐릭터이며, 항우는 과격하고 감정에 치우쳐 항상 한신에게 당하는 모습만 나온
다. 최고 군사라는 범증 역시 항상 항우를 설득하는 데에 실패하여 능력없는 사람으로까지 비춰
지기도 한다. 아쉬움인지 재미인지, 다른 재해석이 궁금해서 곧바로 시바 료타로의 항우와 유방
을 읽기 시작했다.
  
 초한지만이 아니라 고우영 옹의 모든 작품을 추천하고 싶다. 이제 일지매, 임꺽정, 십팔사략 정
도가 남았는데 다 읽으면 무슨 재미로 살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