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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주회] 2009.4.2. 예프게니 키신 피아노 리사이틀 본문

취미/피아노, 클래식

[독주회] 2009.4.2. 예프게니 키신 피아노 리사이틀

꿈토끼양 2009. 4. 3. 23:00



2009년 4월 2일, 예술의 전당.
예프게니 키신의 독주회에 다녀왔다.

사실 난 키신을 좋아하지도, 잘 알지도 못했는데 워낙 유명한 사람이기도 하고 또 다양한 사람의 연주를 들어 보고 싶어서 회사 언니와 함께 가기로 했었다. (그리고 언니가 키신의 팬이기도 하고...)

예매 당일 모든 좌석 매진...
싸고 좋은 자리를 노리려고 이리저리 재고만 있었던 우리는 크게 뒤통수를 맞았다 ㅠ.ㅠ
결국 이래저래 언니가 애를 써 주셔서 자리를 구했다. (가 보니 뒷자리긴 해도 나쁘지 않았다 ^^)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았다.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모음곡 <로미오와 줄리엣> 작품번호 75번
                        - 4곡 줄리엣
                        - 8곡 머큐시오
                        - 6곡 몬테규가와 카퓰렛가

프로코피예프      소나타 8번 B플랫장조 작품번호 84번
                        - 1악장 안단테 돌체
                        - 2악장 안단테 소냔도
                        - 3악장 비바체

                                 《인터미션》

쇼팽      환상 폴로네이즈 A플랫장조 작품번호 61번

쇼팽      마주르카 작품번호 30번 중 4번 c샵단조
            마주르카 작품번호 41번 중 4번 c샵단조
            마주르카 작품번호 59번 중 1번 a단조

쇼팽     연습곡 작품번호 10번 중 1번 C장조
           연습곡 작품번호 10번 중 2번 a단조
           연습곡 작품번호 10번 중 3번 E장조
           연습곡 작품번호 10번 중 4번 c샵단조
           연습곡 작품번호 10번 중 12번 c단조
           연습곡 작품번호 25번 중 5번 e단조
           연습곡 작품번호 25번 중 6번 g샵단조
           연습곡 작품번호 25번 중 11번 a단조


처음 공개했던 프로그램에서 변경이 있었던 듯하다.
1부에 리스트의 곡도 있었던 것 같은데 모두 프로코피예프로 채워지고...
에튀드는 내가 작품 번호를 잘못 알아서 겨울바람을 치는 줄 모르고 '아, 마무리 곡을 겨울바람으로 끝내면 정말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는데, 진짜 겨울바람으로 끝나는 프로그램이어서 너무너무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시간이 없어서 미리 프로그램 예습을 하지 않은 나는 전반부의 프로코피예프가 조금 걱정이 되었다. 음악적 조예가 그다지 깊지 않은 내 입장에서 프로코피예프의 곡은 너무 난해해서 다가가기 힘들거나, 낯설고 강렬해서 오히려 신선하거나 둘 중 하나인데 아무래도 확률적으로 전자가 더 높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잘 모르겠고(언니가 노다메에 나온 곡이라고 하는데 잘 기억 안 나고...), 소나타 8번은 더더욱 모르겠고...
그래도 좋은 곡이겠지 뭐~ 하고 들어갔는데, 나중에 결국 피를 보게 되었다. 이 얘기는 나중에 쓰겠다. (ㅋㅋ)

들어가기 전엔 언제나처럼 프로그램북을 샀는데, 거기에 실린 인터뷰 내용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
그는 진지한 자세로 영혼과 소통하며 마음으로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었다. 꾸준히, 그리고 묵묵히.

2살 때부터 들리는 대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는 그는 어린 나이에 데뷔해서 경이로운 연주를 보이며 신동이라 불려 왔다.
하지만 그는 알고 보면 겸손한 노력파였다. 천재성이나 재능에 안주하지 않고 언제나 성장하기 위해 배우는 자세를 잃지 않으려 한다는 키신. 내한해서도 실내에 틀어박혀 하루에 7~8시간씩 연습을 하고, 공연 시작 20분 전까지 리허설을 하던 연습 벌레.
(7시 40분쯤 올라갔더니 '아직 리허설 중이라 들여보낼 수 없다'는 답변을 듣고 굉장히 놀랐다.)

이하, 프로그램북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신동 소리를 듣고 성장한 키신은 악보를 외운다는 표현을 싫어한다. 작품을 서서히 머리와 심장, 영혼 안으로 끌어들인다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 어떤 작품을 암기할 필요성을 못 느꼈어요. 그저 자연스럽게 내 영혼에 배어들게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 영혼도 감동시킬 수 있어요. 음악을 하면서 외운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가끔 피아니스트가 되지 않았다면 무엇이 되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전 할 일이 없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피아노는 제 영혼 자체이고 전부와도 같습니다. (중략) 연주 활동을 하며 느끼는 것은 역시 연습의 중요성입니다. 식상한 말 같지만 아무리 훌륭한 피아니스트라도 조금만 연습을 하지 않으면 금방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제게 엄숙한 경고라고 느껴집니다. 그건 음악과의 싸움이 아니라 나와의 싸움입니다. 그리고 나만의 세계를 음악 안에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평생 피아니스트가 지녀야 할 숙제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 모든 부담감까지 극복하고 무대에 서는 것은 역시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요?"


8시가 조금 넘은 시간, 공연이 시작되었고, 모두가 숨을 죽였다.
공연을 보러 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연주자가 무대로 올라와서 객석에 인사를 하고 악기 앞에 앉아서 연주를 시작할 때까지의 짧은 시간이 난 왜 이렇게 어색한지 모르겠다. 대개 연주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연주를 시작하기 때문인 것 같은데, 그러면서 생기는 묘한 시간의 틈이 왠지 모르게 멋쩍다.
(하지만 연주자도 아닌 내가 멋쩍어서 어쩔 거냐며 ㅋㅋ)

첫 곡의 연주가 시작되자, 그는 놀랍도록 빠르게 피아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자리가 3층이라 그런지 처음에는 소리가 좀 작게 들린다는 인상도 있었는데, 곧 나 역시 소리 속으로 녹아 들었다.
첫 곡인 로미오와 줄리엣은 각각의 곡들이 특징이 있어서 들으며 굉장히 재미있었다. 특히 마지막 곡은 노다메에서 미르히가 등장할 때마다 나왔던 곡이라고 한다. (왜 난 기억이 안 나지...)

그러다가 프로코피예프 소나타가 시작되었는데...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연주회 전날 회사 사람들과 술을 마시며 키신 공연 이야기를 했는데, 사실 그 전날에도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가 잠을 못 잔(-_-;;) 나에게 사람들이 '오늘도 이렇게 술을 마시다니, 연주회 때 분명 졸고 말 거다.'라 했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키신이 '나의 공연에서 감히 잠을 자다니... 내 공연에서 쿨쿨 잔 여자는 니가 처음이다. 매력 있는데?' 하면서 3층 구석에 있는 나에게 반하고 말 거라며... (아놔...... 우리가 좀 이러고 놀아요 ㅋㅋ)
그런데... 정말 이틀간의 음주와 수면 부족이 겹치면서... 정말 소나타 2악장부터 졸고 말았다 ㅠㅠㅠㅠ 아놔...
이제 연주회 전날은 푹 잘 거야... 엉엉 ㅠㅠㅠㅠ
(하지만 안 자려고 열심히 살을 꼬집은 덕분에 쿨쿨 자진 않았고, 일단 잠결에 연주를 듣긴 다 들었다 ㅠㅠ... 이걸로라도 위안을...)

아무튼 그러다가 1부가 끝났다.
'이제 키신은 나에게 반하는 일만 남았다~ 에헤라디야~' 하면서(-_-;) 정신을 차리고 다시 2부로 들어갔다.

애수로 가득 찬 환상 폴로네이즈도 정말 환상이었지만, 난 특히 마주르카를 들으면서부터 기분이 한층 고조되었다.
특히 Op.59-1을 들으면서는 너무 황홀했다. 아아아~ 샤랄랄라~ 언젠가 꼭 쳐 봐야지!!

마치 피아노와 조심스런 대화를 나누는 것 같던 키신은 쇼팽의 곡을 치면서부터는 피아노와 일체가 되는 것 같았고, 에튀드에 이르러서는 모든 것을 폭발하듯 쏟아냈다. 특히 조용하고 서정적인 10-3번 이별가를 치다가 갑자기 4번 추격으로 넘어갈 때의 전율이란...!! 나도 모르게 눈을 꼭 감아 버렸다.

그리고 격정의 겨울바람으로 마무리!! 아...... 완전 감동이었다 감동......ㅠ_ㅠ

키신이 관객에게 보인 성의는 기대 이상의 것이었다. 무려 30번의 커튼콜과, 10곡의 앵콜곡!!! (앵콜곡이 10곡이야 10곡!!! ㅠ_ㅠ)
앵콜에서도 쇼팽과 프로코피예프로 청중을 매료하더니 마지막은 모차르트로 끝맺었다.

첫 앵콜곡인 쇼팽 녹턴은 들으면서 울 뻔했다...
임동혁의 데뷔 음반에 있어서 한참을 열심히 들었던 곡이었는데(난 왜 이게 언니가 빌려준 키신 음반에 있었다고 생각했지...) 갑자기 선율이 덜컹하고 다가오면서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그에 반해 프로코피예프의 곡에서 분위기를 반전시키며 청중을 압도할 땐 연주가 끝나고 나도 모르게 "옵화 캐간지폭발!!!!!"을 외쳐 버리고 말았다..ㅋㅋㅋㅋ
그 외에 왈츠나 즉흥환상곡 등 귀에 익은 곡들이 많았다. 마지막 곡이었던 터키행진곡은 나에겐 남다른 사연이 있는 곡인데, 어린 시절 나에게 시도 읽어 주고 노래도 들려 주던 우리 천사 언니가 워크맨으로 곧잘 들려주던 곡이었다. 그 곡을 라이브로, 그것도 키신의 연주로, 앵콜 마지막 곡으로 들으니 얼마나 가슴이 벅차던지...

매만지고 나왔다가도 한 곡만 치고 나면 도로 헝클어지던 머리(꼭 아톰 머리 같았다), 그대로 일어나서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인 상태로 열심히 인사하던 모습, 중간중간 커튼콜 때 보여 주던 환한 미소와 만족스런 표정, 나중엔 인사하고 도로 들어가다가 멈춰서 뒤로 돌아서 가슴에 손을 얹고 정중하게 또 인사를 하던 모습...

곡이 끝날 때마다 꺅꺅 소리를 지르며 미칠듯이 박수를 쳤더니 나중엔 좀 힘들었다 ㅎㅎ (오늘 아침에 일어나니 목이 아파서 깜놀... 팔도 아파서 또 깜놀.......)
앵콜곡을 다 듣고 나오니 거의 12시가 다 된 시간이었고, 다음 날 출근을 생각하면 도저히 사인까지 받을 기력이 없어서(ㅎㅎ;;)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다.

그는 정말 대단한 피아니스트다.
피아노를 접할 때의 진실된 마음, 음악과 대화하는 맑은 영혼, 자신과 소통한 관객을 대하는 성심 어린 태도.
이 감동은 정말 오래도록 가슴속에 남아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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