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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영화, 전시

[영화] 써니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5. 11.

*주의!! 이 글은 스포일러를 다수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신 분만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2년 전, '볼트'를 보러 갔다가 좌석이 매진되서 차선으로 봤던 영화가 강형철 감독의 데뷔작인 과속 스캔들이었다. 830만을 달성하기까지는 실제로도 나처럼 전혀 기대하지 않고 봤다가 빵 터진 사람이 대부분이었다고..조폭이나 욕을 대동하지 않은 깔끔한 개그는 물론, 감동까지 주는 아주 괜찮은 영화였다. 오랜만에 재미있게 본 코미디영화임은 물론, 감독의 다음 작품도 기대할 정도로 신선했다.

 2년이 지나 다음 작품인 '써니'가 개봉했다. 캐스팅이 절묘하다, 예전 추억이 떠오른다 등의 평가를 제쳐두고, 일단 강형철 감독의 다음 작품이라는 것만으로도 큰 기대를 했다. 벼르고 벼르다가 지난 토요일에 관람하고, 처갓집에 내려가 월요일에 장인어른 장모님을 모시고 가서 한번 더 봤다. 

 보통 영화를 기대하면 실망하기 쉽상인데 이번에는 대 만족. 스케일을 키운 탓에 조금 산만해진 감이 있지만 그만큼 웃고 즐길 거리는 많아졌다. 특히나 80년대 오덕-_- 인 나에게 배우들의 분장과 소품들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감동이었다. 하지만 웨딩싱어가 그랬듯, 촌스러운 느낌보다는 아기자기하고 발랄한 느낌이 더 많이 들었다. 숨가쁘게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는 편집도 일품. 80년대에 흠뻑 빠졌다가 현재로 시간이 돌아오면 잠시 쉬고, 다시 또 빠져드는 그런 느낌이었다.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칠공주의 과거와 현재 모습이 최대 감상 포인트...이긴 한데 잘 살펴보면 그 시간여행은 나미에게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간여행, 개그, 사랑, 갈등 모두 나미에게서 시작된다. 춘화의 죽음은 당연스레 받아들여져 슬프다는 느낌도 잘 들지 않는 반면, 나미의 실패한 첫사랑은 가슴이 저며 올 정도로 연출에 힘이 들어가 있다. 추억의 비디오 장면에서도 슬픈 사연을 가진 복희보다 그 시절 그 모습 자체인 나미의 모습이 훨씬 아련하게 느껴진다. 칠공주 모두 뚜렷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나미 뿐으로, 우리는 대부분 나미의 시점을 통해 사춘기의 두근거림과 감성을 물씬 느끼게 된다. 모두의 이야기를 전달하려고 했다면 이렇듯 감성을 자극할 수 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미가 '화자'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고 칠공주 모두의 비중이 동일하게 보인다는 점에서 감독의 영리함을 엿볼 수 있다. 

 현재 역할 배우들의 호연도 일품. 현재 역할의 연기자들은 그냥 우는 장면만으로도 먹어준다. 아직도 친절한 금자씨의 마녀가 기억에 남아 있는 김장미 역의 고수희(76년생이다!?)나 연기, 뮤지컬 경력이 20년에 이르는 복희 역 김선경의 눈물 연기는 관록 그 자체다. 또한 나미 역 유호정은 90년대 초에 하이틴 스타 시절이나 청춘의 덫에서의 연기 정도가 기억에 남아있는데, 이 영화에서 3번의 눈물 연기를 보면 외모만 가지고 배우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 특히 하이라이트인 추억의 비디오를 보는 장면에서는 나오려는 눈물을 참느라 혼났다. 내가 오래전 비디오를 보는 클리셰에 좀 약한 면이 있긴 하지만..(아마도 필라델피아의 마지막 장면이 그 시초였던 걸로 기억이..) 

 과속 스캔들의 개그가 신인감독만의 신선함이 아닐까 하는 우려도 말끔히 해소됐다. 아주 확실하게 웃겨준다. 2번의 감상 모두 나미의 빙의 씬은 좌중을 포복절도시켰다. 어찌 저리 연기를 잘할까 했는데 나미 역의 심은경은 이전에 신들린 아이 역을 이미 연기했었다. (뿐만 아니라 서태지폰 광고에 전설의 헥토파스칼 킥까지....자세한 건 엔하위키 심은경 항목 참조) 과속 스캔들의 개그가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왕석현의 귀여움+개인기에 집중되었다면, 써니는 그 힘을 칠공주 각각에게 나누어준 것 같다. 물론 나미에게 감동+개그 파워 비중이 집중된 면도 없지 않지만, 이 정도면 훌륭하다. 

 1번째는 만석의 영화관에서 봤고, 2번쨰는 10%쯤 찬 영화관에서 봤는데, 확실히 코미디 영화는 사람들이 많을 때 훨씬 재미있다. 조금만 웃겨도 여기저기서 빵빵 터지고, 웃음 바이러스에 전염되어 나도 모르게 더 웃게 된다. 사람들이 웃을 준비가 되어있을 때 재미있다고 표현해야 할까나...웃을 준비가 되어있는데 못 웃었던 라스트 갓파더의 씁쓸한 추억이 떠오른다.

 반면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금옥의 캐릭터는 물에 뜬 기름마냥 따로 논다. 과거의 경우에는 '범생 외모인데 괴팍한 성격'이라는 뚜렷한 캐릭터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마치 모태 욕쟁이인 듯한 진희와 대비된다. 현재의 경우에도 이연경의 연기가 갑자기 EBS유치원을 연상시키며 확 깬다. 

 마지막의 떡밥 풀이도 아쉽다. 칠공주의 인생에 굴곡을 주려는 듯한 복희의 갑작스런 등장과, 춘화의  변호사에 의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식 해결이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절묘하게 넘나들던 밸런스를 무너뜨린다. 관객이 마치 써니의 8번째 공주가 된 듯한 몰입감은 이 부분부터 좀 떨어지기 시작한다. 현재의 멤버들이 보니 M의 써니를 틀어놓고 춤추는 장면의 감흥이 좀 떨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재활치료를 받아야 하는 복희가 뮤지컬 배우를 방불케하는 파워풀한 동작과 자신있는 표정을 보여주는 것도 한 몫 한다. 

 그리고 수지의 등장. 수지가 등장할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결말을 지어줄 줄은 몰랐다. 고작 몇 초짜리 한 장면에 대사조차 없음에도 윤 정의 표정은 그간의 세월을 모두 말해준다.  평이하게 끝나려던 결말이 깨끗하게 정리되는 느낌. 그리고 크레딧. 투덜댔던 부분이 싹 씻겨내려가는 듯 했다. 연필화로 보여지는 주인공들의 과거와 현재 모습에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영화를 2번 본 경험은 트랜스포머 때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보고싶은 장면을 다시 보려는 것이 아니라 놓친 장면을 훑어보는, 재감상의 진짜 묘미를 느낄 수 있었다. 효과음에 묻히는 경우가 많아서 잘 들리지 않았던 대사도 맥락을 알고 보니 귀에 쏙쏙 들어오고,  첫 감상에서 놓쳤던 소품들을 확인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오랜만에 재미와 감동 양 쪽에 너무나 만족스러운 작품을 만났다. 더 많은 사람들이 봐서 이번에는 천만명을 돌파하는 영화가 되었으면..더불어, 강형철 감독의 다음 작품도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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