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는 캐릭터 설정과 기반 시나리오를 짜느라 고생깨나 했다. 주먹구구식으로 엮어냈던 이전
캐릭터와 다르게 좀 체계적으로 해 보려고 참고했던 책이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가지 플롯'.
확실히 도움이 되긴 했지만, 직접적인 도움은 얻지 못했다.
그 반증인지, 결과물로 내놓은 기반 시나리오는 지난번 캐릭터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고, 재미
있지도 않았다. 몇 번의 수정 작업을 거쳐서야 그럭저럭 납득할만한 설정이 되었지만, 정작 기
획서에는 캐릭터의 설정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 때문에 그 이후에도 캐릭터의 이미지와 성격
을 공유하느라 많은 회의시간을 소비했다.
원인은 하나의 플롯에 너무 치중했던 것이었다. 한 가지만 가지고 플롯의 완성도를 위해 자체적
으로 수정하고 또 수정하면서 단단해지다 보니 내 생각도 굳어져서 방어적이 되었다. 말랑말랑한
플롯을 최대한 많이 뽑아낸 후 공유해 가면서 납득할 만한 것을 골라내는 것이 선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피드백으로 느꼈지만 이미 지나버린 시간의 압박 때문인지 새로운 플롯은 잘 생각나
지 않았다.
한마디로 초보적인 실수를 한 것이다. 모든 기획안의 전달을 마친 다음날 산 이 책에서는..
음. 이건 하나의 테크닉이야. 플롯을 여러 개 제출하면 이쪽의 의욕을 보여주는 게 되고, 하나
의 플롯을 택하지 않는 것과 5개를 택하지 않는 것 사이에서 상대가 느끼는 '미안한 기분'도 달
라질 테니까.
P.3 '플롯을 만들다' 내용 중에서..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라는 속담이 이토록 와닿은 적도 없었다. 일주일만 빨리 나올 것이지..
뒤이어 읽은 캐릭터 설정 부분에서는 좀 더 체계적으로 설정해 보고자 했던 고민들이 대부분 정
리되어 있었다. 아쉬움을 넘어 일주일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사실 책을 알게 됐을 때는 오랫만의 기획 관련 신간이라 펼쳐보지도 않고 구입했고, 솔직히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옆에는 태그 테이프가 상비되어 있었고, 최소 1년
간은 레퍼런스 북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개인적인 체험이 좀 길었는데, 책 전체로 보면 초보자용의 입문서로 아주 적절하다. 예로 든 게임
들이 일본 콘솔게임들이기 때문에 나처럼 그 쪽의 게임 경험이 많은 사람에게는 더욱 강력한 효과
를 발휘한다. 모든 설명이 이해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예시로 준비한 시나리오도 단순하지만 이해
를 돕는 데에는 충분하다.
디 워 논쟁으로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처음/중간/끝 구성과 일본 전통가극인 노, 일반적인
기/승/전/결의 구조를 하나로 엮어서 알려주는 점도 매우 좋았다. 당연한 내용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 없는 것이, 클라이맥스로 다가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꽤나 자세하게 서술해 놓았다.
플래그에 관한 설명은 반가웠으나 너무 얕았다. 위키피디아 설명의 몇 줄만 긁어오지 말고, 어렸을
때 즐기던 게임북을 예를 들어 좀 더 자세히 설명해줬으면 좋았을 텐데..2판이 나오지는 않을 것 같
으니 이 쪽은 알아서 공부하자.
두루두루 훑고 있는 매우 좋은 책이지만, 어디까지나 입문서라는 사실을 알아두자. 저자의 노고를
생각하면 좀 미안하지만 이 책은 일본 콘솔게임에서의 패턴화된 전형적인 플롯과 구성을 모아둔 것
으로 볼 수도 있다. 꼼꼼히 정리된 실용서이긴 하나, 이미 나와있는 게임을 뛰어넘는 통찰은 부족하
다. 이 책의 내용만을 가지고 시나리오를 생각하면 아마도 일본식 어드벤처 게임(혹은 미연시 동인
게임)을 절대 뛰어넘을 수 없을 것이다.
일본의 게임 시나리오는 FF 10 이후에 가 세계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메이저는 서양시장을 지
향한 평범한 시나리오, 마이너는 10만 오타쿠만을 위한(미소녀가 없으면 이야기가 안되는) 것들 일색
이다. 서양에서는 PC가 아닌 콘솔에서도 헤일로나 바이오쇼크처럼 영화에 못지 않은 시나리오를 가
진 게임이 점점 일본 시장을 위협하고 있다. (헤일로 3은 일본에서 첫주 6만장을 출하하며 주간판매
1위를 달성했다.)
우리나라?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할까..?
한국 게임은 기획력이 부족하다는 탁상공론은 그만 하고, 시나리오를 써 본 경험이 부족한 초보자라면
(나처럼) 이 정도 책으로 시작하자. 게임을 만들어 보지 않은 사람이 어설프게 쓴 게임 시나리오 작법같
은 책보다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사족.
책 다 읽고 서평쓰러 블로그에 왔더니 출판사의 덧글이 달려있었다. -ㅅ-; 서평 써드릴테니 책좀 그냥
보내주시면 안될까요 -.-....? 하고 생각해보니, 책을 받고 저렇게 써놓을 수 있을 지 의문이 들었다.
똑같이 써놓은 것도 책을 받고 쓰면 왠지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겠고...
'책 > 게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 라프 코스터의 재미이론 (0) | 2007.11.27 |
---|---|
[책] 둠 - 컴퓨터 게임의 성공 신화 존 카맥 & 존 로메로- (MASTERS OF DOOM) (0) | 2007.10.20 |
[책] 검과 회로: RPG 기획을 위한 가이드 북 (0) | 2007.08.13 |
[책] 게임업계 일본을 건설한 거인들 (0) | 2007.01.30 |
[책] 게임의 운명을 결정하는 상상력과 기획 (0) | 2006.05.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