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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일기장

아버지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6. 5. 26.
오늘, 아니 어제는 아버지의 22번째 기일이였다.

올해부터는 깨끗하게 양복도 차려입고, 인터넷을 뒤져 지방도 내가 썼다. 이젠 다 컸다고

하는 말이야 중학교때부터 들어온 것 같지만, 오늘은 왠지 정말 그렇게 된 느낌이 들었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나에게 아버지는 미국가서 돈을 벌고 계신다고 거짓말을 하셨다. 무슨

신파극도 아니고..그런데 철없던 나는 우리 아버지가 미국에서 오기만 하면 우리집이 제일

부자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으니 신파극을 아주 제대로 해냈던 셈이 된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게임팩을 산다고 만오천원을 들고가서는 3천원을 하루종일 오락실에서

쓰고난 다음 몰래 장난감을 대신 사가지고 왔다가 혼날 때 처음으로 어머니가 방으로 끌고가는

손을 뿌리쳐 버렸다. 망연자실하셨던 어머니는 방으로 가서 그냥 우셨고, 누나가 빨리 가서

사과하라는 말에 '엄마 미안해요..' 하면서 울었더니 그제서야 말씀해 주셨다. 우리집은

원래 아버지가 안 계시다고, 나 어렸을 적에 돌아가셨다고.

하지만 그 말을 들었을 때 별로 쇼킹하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왜냐면 나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원래부터 없었던, 정말 환상 속에나 있던 존재였기 때문이다. 아이들한테 자랑하긴

했지만, 나조차도 언제 볼지 생각할 수 없어서였을까? 그래서 보고싶다는 생각도 별로 들지

않았다. 후에 아버지의 사진들을 볼 때도 별 감흥은 들지 않았다.

날 볼때마다 '지 애비를 쏙 빼닮았어'하는 어른들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디가

닮았다는 거지? 하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 뿐.

머리가 조금 커지고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몰라서 고민하던 시절, 나에게 인생의 조언을 해줄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제서야 '나도 아버지가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였다. 당연히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어제 제사를 지내면서 영정사진을 들여다보다가 10년이 넘게 보아온 그 사진 속의 얼굴이

나랑 꽤 닮았다는 것을 느꼈다. 입은 전혀 다른데 눈이 완전 똑같다. 그래서 풍기는 분위기가

비슷하다.   

아버지가 33세에 돌아가셨으니 요즘으로 생각하면 정말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건데,

점점 내가 그와 비슷해져 가서일까?  처음으로 정말 아버지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슬프다고, 안타깝다고는 여러번 생각했지만 아버지 본인이

불쌍하다고 생각한 건 처음이였다. 주변 사람들이 훨씬 불쌍하다고만 생각했다.

내가 33살이 될 날도 멀지 않았다. 어느 때보다도 그 사진속의 얼굴과 비슷해져 있을

그때, 아버지 당신이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게 되어있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아버지를 원망하고 없던 존재로 여겼지만,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기대고 싶을 때 떠올렸던 것이 아버지이기도 했으니까.

사진을 또다시 들여다보면서 느끼는게, 정말 피는 물보다 진한 것 같다.
 


 낚시하려던건 아니고..-_-; 몇년전 머리 노랗게 염색하고 다닐때 지인들이 나랑 똑같다고 놀렸었는데,

사실 나보다는 아버지를 10배쯤 더 닮았다.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도 아버지 기일도 정확히 기억 못하던 나에게 '너희 아버지 제사

5월 25일이잖아.' 라고 말했던 사람이 기억난다. 혹시 그 일이 그 사람을 다른 사람과

유난히 달리 보이게 만들었을까? 정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작년에는 올해 성묘라도

같이 갈까 생각했었는데, 그러지 못하게 되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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