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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생각상자

따라가기

by 일본맛탕 2009. 1. 10.
누가 그랬지. '번역은 반역이다'라고.
아무리 뛰어난 번역도 어딘가에서는 분명 욕을 먹는다.

원문을 훼손시키지 않으려고 지나치게 충실하게 옮겨서 독자가 위화감을 느끼는 것과
결과물의 유창함과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다가 심지어 원작과 다른 문장이 되어 버리는 것
어느 쪽이 더 나쁜 일일까? 요즘은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적절히 절충하되 전자는 원문만 똑바로 읽으면 어려울 것 없는 일이니 후자에 좀 더 노력을 쏟았는데(나름 책도 많이 읽고 표현 노트도 만들고 맞춤법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자꾸만 주변에선 전자를 강요한다.
아니, 이제 후자 스타일의 번역을 했다가는 내가 감당할 자신이 없어진다. 남을 설득시키는 일이 너무 어려워서.

날이 갈수록 번역자로서의 아이덴티티에 혼란이 생긴다.
난 복사기일까? 그냥 말하고 글쓰는 복사기?
A를 넣으면 A' 정도를 뱉어낼 수 있는, 두 나라 말을 할 수 있는 복사기?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숱하게 발버둥을 쳤는데 나아지는 건 하나도 없다.
한 문장을 쓸 때도 수십 번을 고민하고, 선택하고, 써 보고, 지우고, 다시 보고,
사실 새로 뭐 하나 만드는 것과 진배없는 작업인데 그걸 알아 주는 건 같은 번역자들뿐이다.
애초에 이 길을 걷게 된 것 자체가 에러인가...

남이 한 걸 옮기고, 남의 그림자를 쫓아가고,
난 심지어 취미 생활로도 남이 그려 놓은 악보를 따라 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마저도 온전히 해내지 못하고 있지만...

난 창의적이지 못한 인간인 걸까?
그냥 이렇게 평생 누구 그림자 놀이만 하다가 사라지면 되는 걸까?

그런 의미에서 2009년엔 정말로 그림을 그려야겠다.
그러면 조금은 나아지겠지? 나아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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