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등등
내가 즐겼던 교육용 게임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9. 12. 22:46
나는 무언가를 암기하는 데에 굉장히 취약하다. 내 암기력이 어떤지는 정확히 측정해보지 못했지만, 확실한 것은 눈으로 보면서 달달 외는 행위 자체를 잘 못 견딘다는 것이다. 고3때 영단어를 외울 때 단어 시험을 계속 풀면서 외우는 습관이 들었고, 그 습관은 일본어를 전공한 학부때도 계속 이어졌다.
엊그제 아트 오브 게임 디자인을 읽다가 게임을 '문제 풀이'에 빗대어 설명하는 부분을 보고 룰이 매우 단순하긴 하지만 내가 '단어 게임'을 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책 본문의 '문제 풀이'와는 사실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이니 오해가 없기를..)
단어 시험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외울 단어를 연습장의 끝 열까지 쓴다.
2. 단어를 보고 뜻을 써 넣는다.
3. 뜻을 적지 못한 부분은 빨간색으로 써 넣는다.
4. 단어 부분을 접어서 보이지 않게 한 후 이번에는 뜻을 보고 단어를 써 넣는다.
5. 단어를 적지 못한 부분을 빨간색으로 써 넣는다.
(이 과정을 계속해서 반복한다.)
몇 번 반복하면 페이지가 이렇게 채워지고
조금 부끄럽지만 글자가 보이도록 당겨서 보면 이렇다.
써 놓고 나니 무슨 'XX대 합격생의 공부 노하우'같은 포스가 풍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방법을 10년 간 사용한 나는 영어를 포기했고, 전공인 일본어도 중급 수준에서 한계를 느꼈으니 이 방법은 노하우로서는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을 할 때 만큼은 공부를 한다는 부담감이 없었고, 하다보면 시간 가는줄 모르게 했다는 것이다. 이, 이것은 교육용 게임의 이상이 아닌가!? 그냥 놀다 보니 익혀졌어요! 등의..
내가 10년 동안 질리지 않고 했으니 성공한 게임이다! 라는 자기망상적 가정을 건 뒤(-_-), 그 성공요인(-_-;)을 분석하고, 만들 때의 원칙을 세워보았다.
1. 집중력이 필요했던 다른 과목에 비해, 이 쪽은 그냥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계속 반복하기만 하면 됐기 때문에, 다시 할 때의 부담감이 없었다.
=> 플레이를 시작할 때의 부담감을 가능한 한 낮춰야 한다.
2. 한 줄을 끝낼 때마다 빨간색으로 쓰여진 틀린 단어를 통해 '나는 70점을 맞을 상황에서 80점을 맞을 수 있게 되었다'와 같은 피드백을 즉각적으로 받을 수 있었다.
=> 게임의 보상은 해당 학습의 '성취도'와 연결되어야 한다.
3. 페이지를 접으면서 반복하다가 노트를 다 채울 즈음 종이를 펴보면 페이지의 붉은색 비율과 모양을 통해 내가 어느 단어에 취약한지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 유저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부분을 알려주어야 한다.
정리하고 보니 별로 새로운 요소는 아니고, 닌텐도가 뇌단련, 위핏 등의 각종 트레이닝류 소프트웨어에서 너무나 잘 하고 있는 요소들이다. 게임보다 트레이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긴 하지만, 무언가를 가르치는 게임을 만들려면 저렇게 하는 것이 정석일 듯 하다.
하지만 우리는 트레이닝류 소프트의 한계도 잘 알고 있다. 트레이닝류 게임을 중독성이 쩔어요! 라면서 계속해서 즐기고 있는 유저가 없고(집에들 갖고계신 트레이닝 소프트를 지금도 즐기고 계신 분이 있다면 손!), 전 이 소프트웨어로 영어를 정복했어요! 라는 유저도 찾아볼 수 없다. 못해본 사람에게는 효험이 있을 것 같은 물건이지만 해 본 사람이 효험을 믿고 다시 사지는 않을 물건이다.
온라인 게임이라면 '게임에 계속 체재하도록'하는 것이 포인트인데, 교육용 게임에서는 유저가 떠나지 않고 계속 게임을 하도록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반면, 교육 컨텐츠이기 때문에 효험을 모르는 신규 유저가 계속 유입될 가능성은 기존의 온라인 게임보다 훨씬 높다. 새학기가 되면 입시학원에 새 고3들이 등록을 하고, 디자인만 바뀐 엠씨스퀘어가 계속 팔리듯이. (교육에 비중을 더 둔 게임이라면 헬스클럽 식의 모델을 적용해서 좀 더 뽑아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이야기가 마케팅 쪽으로 잠시 빠졌다. 만약 단어를 외울 때 이런 방법을 쓰는 사람이 꽤 많았다면, 위의 원칙을 교육용 게임을 만들 때 참고해봐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