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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설, 에세이

[책] 남한산성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9. 26.

 칼의 노래 애장판을 구경하다가 훑어보고, 친구 생일선물로 책을 사러 갔다가 한번 더 보았
으나 내키지 않아 지나쳤지만, 연휴때 남한산성을 가기로 한 전날 서점에 들렀다가 다시한번
마주쳤을 때는 묘한 일치로 생각하여 고민없이 집어드니, 한 권의 책하고도 인연은 있는 거라
고 볼 수 있을까. (베스트셀러 한 권 사본 걸 가지고 주저리주저리..)

 이 카테고리(언젠가는 카테고리로 빠져나가겠지)에서 몇 번 이야기한 것처럼, 나는 소설
을 좋아하지 않는다. 반면 역사서는 꽤 좋아하는 편이고, 역사 소설은 누군가의 생각에 지
나지 않는다는 나의 편견과 달리, 역사를 보는 하나의 시각으로 이해한다..고우영 옹의 작
같은 경우 만화라서 재미있는 것도 있지만 동서고금의 역사를 비교하는 고우영식 해석이
즐겁기 때문에 좋아한다.

 칼의 노래를 다시한번 읽기에 앞서 남한산성 이야기를 하면서 한 가지를 추가해야겠다. 나
는 김훈의 눈으로 바라본 우리 역사도 좋아한다. 김훈의 시각은 분명 현대적이다. 등장인물
의 대화에서 조선시대라고 생각할 수 없는, 틀에 박힌 사극과는 다른 '고뇌'를 읽을 수가 있다.
현대식으로 표현된 전투 장면도 지루하지 않다. 그렇다고 작품의 시대와 분리된 느낌이 드냐
고 하면 그건 또 아니다. 그래서 좋다. 어렵지 않게, 지금의 시각으로 역사에 뛰어들 수 있어서..

 칼의 노래에서도 그랬듯 전쟁을, 민족의 아픔을 그리는 데에 있어 김훈의 표현은 참으로 탁월
하다. 참혹하고 장렬한 전투는 없지만, 추위와 배고픔이 성 안을 옥죄어온다. 현역 시절 겨울에
야간 경계를 설 때마다 손끝, 발끝, 코끝이 끊어질 것 같은 추위를 느껴봤던 경험이 그런 절절
함을 조금이나마 더 느끼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임진왜란과 달리 남한산성에서의 싸움은 규모도 작고 치열한 싸움이 없었기 때문에 칼의 노
래와 비해 하이라이트 신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그저 시간이 흐를 뿐이다. 그러나 줄어가는
식량과 고립된 상황의 절절함, 언제 성내가 전부 도륙될 지 모르는 불확실성을 껴안은 채로 존
명의 긍지를 마냥 저버릴 수도 없는 상황에서, 삼배 구고두라는 굴욕적 사건의 긴 전주곡을 천
천히 들려준다. 

 칸(청 태종)의 시각에서 본 조선의 모습도 이채롭다. 애초에 맞설 힘이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
와,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처럼 극렬한 저항을 할 것도 아닐진대, 저들은 왜 저러고 버티어 있
는 것인지..그럴 수 있게 만드는 힘은 대체 어디서부터 나온 건지..강대한 힘을 가진 칸이 이들을
제압하기보다 스스로 나와 절하게 만든 것은 정말로 그런 호기심의 발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을 해 본다. 교과서식으로 생각해 보면, 문화적으로 뒤쳐진 후금이 우리에게서 한족과 같은 긍지
를 엿본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자만일까..? 

 너는 스스로 죽기를 원하느냐. 지금처럼 돌구멍 속에 처박혀 있어라.

 너는 싸우기를 원하느냐. 내가 너의 돌담을 타 넘어 들어가 하늘이 내리는 승부를 알려주마.

 너는 지키기를 원하느냐. 너의 지킴이 끝날 때까지 내가 너의 성을 가두어주겠다.

 너는 내가 군사를 돌이켜 빈손으로 가기를 원하느냐. 삶은 거저 누릴 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이미 말했다.

 너는 그 돌구멍 속에 한 세상을 차려서 누리기를 원하느냐. 너의 백성은 내가 기른다 해도, 
 거기서 너의 세상이 차려지겠느냐.

 너는 살기를 원하느냐. 성문을 열고 조심스레 걸어서 내 앞으로 나오라. 너의 도모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말하라. 너의 도모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말하라. 내가 다 듣고 너의 뜻을 펴게 해주
겠다. 너는 두려워 말고 말하라.

 P.285 청 태종이 인조에게 보내는 문서 내용(소설의 내용으로, 원문은 아님)

 '나는 관대하다'와 별다를 것 없는 내용이지만, 성 안의 고뇌를 함께 한 입장에서는 그리 우습
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남한산성에 갈 때까지 1/3도 읽지 못했을 뿐더러 남한산성을 제대로 돌아보지도 못했다. (성곽
벽돌도 보지 못했다 -ㅅ-;) 겨울이 오기 전에 다시한번 이 고뇌들을 되씹으며 산성에 올라야겠다.


 

남한산성 역에서 동행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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