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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게임

[책] 검과 회로: RPG 기획을 위한 가이드 북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8. 13.

                                                           (번역판 이미지가 없어서 원서표지 쓱싹)


 언식님께서 작년에 애타게 찾으시던 책인데, 인천 영풍문고를 2바퀴째 돌 즈음 우연히 눈에 띄어 그대로 집어들었다. 회사 동료분의 책상에도 꽂혀 있어 전부터 읽어보려고 생각은 했으나 차일피일 미루던 터, 마음먹고 책장을 폈다.

 제목은 RPG만을 위한 것처럼 붙어있지만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기억해두면 좋을 만한 내용들이 많다. 세계관이나 시나리오의 탄탄함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중요한 것이고(특히나 최근의캐주얼 게임들에서는 더더욱) '성장'이라는 요소를 배제하기 힘든 온라인 게임의 특성 상 참고할
내용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통계를 사용하지 않은 관념적인 분석이긴 하지만 유저 성향을 패턴화해놓은 부분은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하드코어 게이머와 캐주얼 게이머는 게임의 기본 플레이부터 밸런스까지 항상날 고민하게 만드는 요소인데, 이 책에서는 플레이 성향은 물론, 그들이 게임에서 무엇을 원하는지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책을 읽고 느낀 것이지만, 나는 심각한 캐주얼 게이머다 -_-;

 그런데 여기서 한발자국 더 앞서나가 있는 것이 좀 더 세분화된 플레이 성향으로, 괄호 안의 게임 제목은 내가 생각하는 이들의 선호할 만한 게임이다.

 파괴광             (진 삼국무쌍, 데빌 메이 크라이 등 PS2에 많은 '쓸어버리는' 액션 게임)
 문제 해결사      (젤다의 전설, 메탈기어 솔리드, 이코)
 보물 사냥꾼      (디아블로, 리니지, 뮤)
 이야기 관람객   (파이널 판타지, 슈퍼로봇대전)
 자아도취자       (네버윈터 나이츠, 라그나로크 온라인)
 관광객             (심즈, 피크민, 비바 피냐타) 

 본문에도 쓰여 있지만, 1가지 속성에 1가지 게임이 해당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2~3개 속성의결합에는 분명히 해당된다. 언제나 예외가 있을 수 있는 '그럴듯한' 사회 과학적 분석이지만,유저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생각할 때에는 분명히 도움이 된다. 저기에 자신만의 리스트를 추가해서 써먹으면 좋지 않을까?

 '장르의 간단한 역사' 부분은 기획자를 꿈꾸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게임을 좋아한다면 한 번씩 읽어두면 좋을 듯 하다. '드라크: 해가 뜨는 나라의 RPG'가 드래곤 퀘스트의 줄임말인 Draque였다는것을 알고는 푸큭 웃었다. 원안에 충실해도 한국에서 출간되는 책이라면 도라퀘 쪽이
맞는 번역은 아닐지..

 주옥같은 내용들을 읽어나가며 안타까웠던 것이 '나는 과연 스퀘어 게임들과 와우 이외에 RPG를 몇 가지나 해봤나..?'였다. TRPG를 하지 않았던 것도 아쉬워진다. 하지만 TRPG를 즐기기엔 세상이 너무 복잡 다난해졌고, 저자가 세계관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데이어스 EX를 해봐도 아무런 감흥이 없는 것이 현실이라면 현실이다. 다만 그동안 있었던 것들이 어떤 요소 때문에 유저들을 끌어들였는 지를 되돌아보는 것은 확실히 중요하다.

 그 외에는 게임 프로젝트에서 기획자의 영역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분명 좋은 내용이긴 한데, RPG기획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는 일반론이다. 

 앞으로도 몇 번이고 발췌독을 하며 읽을만한 부분은 룰 설정과 세계창조 부분을 설명한 '신들의 작업' 파트다. 초보 기획자가 100%부딪힐 만한 함정을 자세하게 풀어놓고 있어서, 읽고 나면 기억나는 것이 적더라도 일보 전진한 듯한 기분이 든다. 

 오래전에 썼던 내 글 을 포함해서, 게임을 만들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한국 게임(혹은 애니메이션?)의 문제를 논할 때 자주 써먹는 말로 '기획력의 부재'가 있다. 하지만 정작 문제를 논하는 사람들이(슬프게도 나를 포함해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별로 보지 못했다. (그래도 이 문제는 끊임없이 제기되어야 하며, 장기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과제임엔 틀림없다.)

 그런데 본문에 있는 다음 내용에서 정말 어떤 것들이 부족한지를 단번에 깨달을 수가 있다.

  '커넥션을 보며 내가 얻은 영감은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단 한 가지의 판타지적인 요소만 더해져도 그것이 역사, 정치, 사회구조, 종교, 궁극적인 운명에 확연한 장기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인간이 사는 세계에 드래곤이 등장하는 것은 여러가지 문제를 야기..(중략) 

 ..만일 드래곤이나 페가수스와 같은 날개달린 동물들이 하늘을 휙휙 날아다니는 세계라면, 창이 넓은 모자가 유행할 것이며(하늘에서 떨어지는 배설물 때문에), 매력적인 초가지붕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오물이나 불길을 그다지 막아주지 못할 것이다.사람들은 지하에 집을 마련하거나 철로 만들어진 지붕을 만들까? 드래곤 배설물 처리 산업이 발전하는가? 소방서는 어떠하며, 보호해주
는 대가를 받는가?'

 P.226 '현실에 대한 기초 지식' 중에서

 바로 이런 접근이 부족해서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나조차도 어떤 신화를 가져올까, 어떤 게임이 설정이 좋았지? 부터 시작했었으니까. 하지만 한 요소를 도입하고, 그것이 일으킬 파장이 어떤 부분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은 확실히 먹힐 만한 방법으로 보인다.

 이런 노력이 왜 부족하냐고? 중요한지 아닌지가 바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쏟아지는 버그가 폭주하는 시기에는 1순위로 뒤로 밀쳐지기가 일쑤다. 그래서 이런 설정이 나온다. 이런 것들을 그대로 살리려면 치밀함을 살리려는 집착과 그를 실행하는 부지런함이 요구된다. (다른 쪽에서도 부지런함을 요구하는 것들이 많지만) 
 
 어쨌든 이 책은 이처럼 바로바로 써먹을 테크닉보다는, 게임을 기획하는 데에 필요한 기초 지식과 필요한 마음가짐이 담겨 있다고 보면 된다. 부록으로는 유명 RPG를 만든 프로듀서 들과의 인터뷰, 그리고 저자가 만든 게임의 자료가 실려 있다. 아직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저자가 풀어놓은 이야기들에 대한 증빙자료라고 봐도 될 듯 하다.



 결과적으로는 휴가 마지막날인 오늘까지도 다 읽지는 못했지만, 애초에 마음먹고 읽고 자시고 할
것이 없는 책이었다. 내용의 깊이와 통찰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재미있다. 기획자를 꿈꾸는 사람에
게는 강추할 만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게임 그 자체를 즐긴다면 한번쯤 읽어볼 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