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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등등

우리 할머니 이야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6. 7. 29.
 나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우리집은 식당을 했는데
어머니는 식재료를 사러 다니시거나 카운터를 보느라 바쁘셔서 12년치 아침밥과 도시락은 모두
할머니께서 해 주신걸 먹고 학교를 졸업했다.

 학교다니는 내내 아침 안먹는다고 뭐라 하시는 할머니한테 짜증을 내고, 제발 아침상 차려놓고
그 앞에서 담배좀 피우지 마시라고 화를 내기도 했다. 중학생 이후 할머니는 무섭지 않다고 대놓고
화를 낸 적도 많았고, 고등학생 이후에는 말을 거의 안 들었던 것 같다.
 그랬던 내가 스물한살 때 학교를 휴학하고 일을 하면서 저절로 할머니께서 키워준 고마움을 깨닫게
되었다. 월급날마다 담배 두 보루를 사다드릴 때 너무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고 내가 그동안 정말 해
드린 것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아서였을까? 그제서야 할머니가 언제 돌아가실지도 모르겠구나..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 마음을 할머니도 느끼셨는지 점점 나한테 의지하시는 모습이 보였다. 한번은 누나까지 네 가족이
민속촌엘 갔는데 그 때 내 손을 꼭 잡고 누나가 부축해 드리려고 해도 은근히 피하시는 것이였다.
 몇 달이 지나 군대에 가던 날 우시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막내삼촌이 군대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걱정은 아마 더 크셨을 거다.

  군대에 가서도 다른 가족들보다 유난히 할머니 모습이 자주 떠올랐다. 일병이 되고난 다음 5월 행사로
효도 글짓기가 있었는데, 나는  뒤늦게나마 깨달았던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 그러니까 대략 저 위에 쓴
것과 비슷한 글을 써서 포상 휴가증을 받았다. 그 글을 갖고가서 보여드렸을 때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하지만 나는 휴가를 나갈 때마다 집에는 거의 있지 않고 친구들하고 놀러다니다 마지막날이나 집에서
가족들이랑 밥을 먹곤 했다. 복귀할 때마다 '전역할 때까지 할머니가 살아 계실까' 하고 생각을 해 보았다.
만약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할까? 눈물이나 흘릴까? 하고..

 상병을 달자마자 가족들이 면회를 왔는데, 할머니는 이등병때 면회오셨을 때와는 달리 많이 쇠약해진
모습이였다. 밥도 거의 드시지 않았고 말씀도 많이 하지 않으셨다. 그저 간간히 내 손을 꼭 잡으실 뿐이였다.
그날은 할머니 손을 꼭 잡고 잤다.
  그리고 몇주 뒤 첫 대대 훈련을 뛰었다. 텐트에서 맨날 고참들한테 갈굼당하던 시절도 끝나고, 이제는
내가 후임들을 가르치게 되면서 '이제 군생활좀 할만 하구나'하고 생각하며 잠에 들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화생방 상황이 발동되어 방독면을 쓰고 작전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포대장이 나를 부르더니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되물었다.

 "친할머니입니까 외할머니입니까?"


외할머니라는 대답에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서 통곡했다. 방독면 안이 눈물로 차오르고, 방독면을
벗으니 얼굴에 묻은 위장이 다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난밤 갈궜던 포반 후임들도 내가 우는 모습을
다 보고 있었지만 나오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대로 긴급 휴가증을 발급받아 전투모도 쓰지
않고 가다가 헌병에 붙잡혀서 조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슬픈 마음에 아무 생각이 없었다.

 '10년만, 아니 5년만 더 사셔도 되는데..지금 가면 따뜻한 밥을 해주실 것만 같은데..'

   할머니는 지난밤 새벽에 잠든 채로 돌아가셨다. 정말 자식들만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신 그 삶
그대로를 나타내는 임종이였다. 군복을 입은 채로 장례를 치르는 동안 다녀가는 사람들마다 너무
부럽다고, 호상이라고들 하는데, 83세셨으니 살 만큼 사신 셈이지만 나는 할머니가 보고 싶어서
너무 슬플 뿐이였다. 다른 사람들은 웃고 고스톱 치고 있는데서 마음껏 울 수도 없었다.

 문상을 왔던 아는 동생 녀석이 같이 술을 마시면서 했던 말이 기억난다.

"형, 형한테 할머니는 다른 애들이 할머니 보는 거랑 다르잖아."

 그 말이 얼마나 고맙던지..그제서야 나는 마음놓고 통곡을 했다. 다음날 할머니의 유골을 막내삼촌이
돌아가신 임진강 쪽에 뿌려드리고 나서야 이제는 편하게 가시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집에 와서
할머니께서 잘 입지도 않고 고이고이 모셔둔 옷을 꺼내면서 옷에서 풍기는 할머니의 체취에 또한번 슬픔이
밀려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자리에 있던 재털이 위에 꽁초가 여럿 있었고, 구겨진 담뱃갑이 있었다.
할머니는 한라산을 피우시는데 전날에 하나로로 잘못 사와서 그날밤 담배를 못 피우셨다고 한다. 마지막
가시기 전에 좋아하시던 담배 한 대 못 태우시다니....재떨이를 보면서 마지막 눈물을 흘렸다.

 17년 동안 살았던 집 곳곳에 묻어있는 할머니의 자취는 너무나 진한 것이였다. 휴가복귀 했을때 바깥보다
군대가 편하다고 느낀 것은 아마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였나 생각한다.

 병장이 된 후 분대장 교육을 갔을 때 마지막 시험 전날이였다. 버릇대로 침낭을 얼굴까지 뒤집어쓰고
자는데 꿈에 아주 좋은 식당에 할머니랑 어머니가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예전에 했던 식당이 망해서
할머니가 고생을 엄청 하셨었던 것을 보상하기라도 하듯. 정말 커다란 한정식 집이였다.
 왜 그런 꿈을 꾸었는지는 모르지만, 깨어난 나는 침낭을 뒤집어 쓴 채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 날
있었던 최종 시험에서 여단 1등을 해서 포상휴가를 또 받았다. 어머니께 전화해서 기쁜 소식을 알리고
어젯밤 꿈 이야기를 하니, 어머니도 우셨다.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다고.

 그리고 3년이 지났다. 이젠 슬퍼했던 기억도 희미해져 가지만, 보고 싶은것은 여전하다. 살아계실 때
못 해드린 것의 보상심리인 건지.. 강원도에 홀로 계신 친할머니께라도 더 하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다.
 그래서 내일은 강원도에 간다. 친할머니께서도 혼자 계셔서 전화할 때마다 반색을 하시면서 나를 반기
시는 것도 비슷하고, 내 손을 꼭 잡으시는 것도 외할머니랑 비슷하다. 명절때 서울에 오지 않으신 지도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 경포대에 같이 가시자고 했더니 가신다고 한다. 우리 가족한테 의지하고 계신
것이다.

 부모님께 살아계실 때 잘 하라는 말은 진리다. 대부분 그걸 경험으로 터득하긴 하지만 말이다.


정말 죽어서 저승이라는 데를 간다면, 할머니를 한번 꼭 뵙고 싶다. 20년동안 탈 없이 키워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인사라도 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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