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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일기장

사과와 다짐

꿈토끼양 2012. 2. 9. 04:44

두릅씨가 오늘 약속이 있다고 늦게 들어올 것 같다고 했다. 만나면 늘 늦게까지 마시는 멤버와의 약속이라는 걸 나도 알았기에 오늘도 으레 늦겠거니 생각하고 있었고, 역시 새벽 늦게야 집에 들어왔다.


전에는 고주망태가 되어서 들어와서는 방인지 거실인지 분간도 못하고 아무데서나 자려고 하는 게 너무 싫었다. 나도 술을 좋아해서 자주 마시는 편이고, 또 집에서 가족들이랑 마시면서는 가끔씩 필름도 끊기지만, 밖에서 마시면서 자기 몸도 못 가눌 정도로 과음을 하고 들어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취해서 들어와서는 거실에서 잘라치면 빨리 옷 갈아입고 침대에서 자라고 방으로 들이밀며 화를 내곤 했다. 내일 출근해야 할 사람이 멀쩡한 침대 놔두고 추운 밖에서 자려는 게 속상했다. 물론 굳이 분류하자면 애정에서 비롯된 행동이긴 하지만, 그게 반대로 불같이 화를 내는 부정적인 방식으로 표출되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방에서 자든 거실에서 자든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 집 밖에서 자겠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거실에서 자겠다고 하면 짜증을 내기보다는 그가 눕는 자리를 봐 주고 거실에 따뜻한 이불을 펴 주는 게 사랑하는 그를 더 위하는 행동 아닌가? 씻지도 않고 자는 게 속상하다면 직접 양말을 벗겨 주고 수건을 가져와서 얼굴을 닦아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마음이 아팠다. 나는 그동안 그를 위한답시고 내 본능과 감정에만 충실한 행동을 해 왔던 거다.

오늘도 그는 거실에서 자겠다고 했다. 나는 웃으면서 그러라고 했다. 그런데 짬뽕을 끓여 줬더니 속이 좀 풀렸는지 정신이 든 것 같길래 "내일 출근할 건데 이만 자야 하지 않을까? 걸어갈 수 있으면 방에 들어가서 침대에서 편하게 자요." 하고 말했더니 그는 순순히 방으로 들어갔다.


내일 속풀이하라고 계란국을 끓여 놓고, 정월대보름이라고 오곡밥 지을 때 샀던 잡곡들이 남아 있어서 불렸다가 예약취사를 안치고 나니 새벽 4시다. 그는 옆 방에서 세상 모르게 자고 있다. 아마 너무 많이 마셔서 오늘 나와 했던 대화들을 다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내가 짜증내고 화냈을 때도 그는 아마 다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모두 남아 있다. 그리고 어느 쪽이 훨씬 좋은 길인지도 알고 있다. 그동안 멋대로 굴었던 감정들을 모두 주워담아서 앞으로는 몇 배로 잘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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