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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생각상자

진심과 소통

by 일본맛탕 2009. 2. 11.
회사에서 업무 역량 강화를 위한 이틀짜리 교육을 받았다. 외부 업체가 와서 진행을 했는데, 나를 알고 남을 알고 나를 성장시켜 더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도모함으로써 건전한 회사 생활을 하자는 취지였다.

첫 날의 교육은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나에겐 너무 힘들고 버거웠다.
부와 명예를 거머쥔 사람들을 성공한 사람으로 일컬으며 마치 그와 같이 되기 위해 그들의 사고방식을 졸졸 좇아야 당신도 성공한다는 듯한 강의가 참을 수 없이 싫었다.
안 그래도 자기계발서와 성공한 사람의 비법서 같은 책을 제일 싫어하는데.

성공한 비즈니스맨이 되기 위해서는 낯도 가리지 말아야 하고, 남들 앞에서 처세도 잘해야 하고, 머리도 잘 써야 하고, 이런저런 궁리도 해야 하고, 회사에 몸을 바쳐야 하고, 한없이 부지런해져야 하고, 안테나를 세우고 남들 비위 맞춰야 하고...

내가 왜 그렇게 '회사가 이상적인 인재상으로 여기는 천편일률적인 비즈니스맨의 전형'에 나를 맞춰야 하는 건지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나는 그와는 조금 다른 방식이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일하고 있는데.
게다가 난 직종이 영업도 아닌데. 내가 속한 직종은 성실히 일하고, 납기 맞추고, 꾸준하고 묵묵히 맡은 바를 열심히 해야 하는 직종인데.

난 그렇게 자산이 몇 백억이 되고 싶지도 않고, 좋은 차를 끌고 아침 6시에 출근하고 싶지도 않고, 그냥 내가 좋아하는 일 열정적으로 하면서 즐겁게 살고 싶다... 그냥 그러면 안 되나? 왜 꼭 승진을 해야 하고, 월스트리트 입성에 침을 흘려야 하고, 부와 명예를 갈망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불평도 잠시, 하루의 교육이 끝나고 나니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가 밀려왔다. 난 그 모든 불만을 혼자서만 조용히 생각할 것이지, 적어도 겉으로는 웃어 보일 것이지, 왜 거기서 그대로 표출하고 그러고 앉아 있었지...?
(교육 내용이 맘에 안 드니 계속 웃지 못하고 뾰루퉁한 표정으로 내내 앉아 있었다는 얘기다.)

난 요령도 없고 임기응변도 서툴다. 낯을 좀 가리는 편이라 익숙지 않은 자리에선 안절부절못하고, 뭔가가 싫거나 마음에 들지 않을 땐 좋은 척을 못하고 그걸 꼭 싫은 티를 낸다. 하지만 내가 어떤 업종에서 어떤 일을 하든, 인간적으로 그러면 안 되는 건데.

난 내가 신념을 가지고 있는 가치에 대해 헌신할 수 있는 게 나의 장점이라 생각했지만, 반대로 얘기하면 이는 곧 신념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얘기라는 걸 깨달았다. 그 상황에서 뭔가를 한다면 그건 자의가 아니다.

오래도록 함께해서 익숙하고, 서로 잘 알고, 내가 완전히 마음을 열고 믿을 수 있는 사이에선 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내가 믿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며 내 감정을 밖으로 헤프게 허비하지 않는 것, 그런 방식이 맞다고 생각했고, 지금까지 그 방식을 고수해 왔다.

하지만 살다 보면 싫은 일에도 부딪히고, 원치 않는 상황에도 부딪히게 마련인데 난 왜 그런 상황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취하지 못하는 걸까?

이틀의 교육을 마치고 같은 조 멤버로부터 피드백을 받았다.
'표정이 없어서 내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다음부터는 조금 더 많이 웃으시면 좋겠어요.'

내가 아무리 포장에 서툴러도, 그래도 남들과 소통해 나가기 위한 최소한의 포장은 필요한 건데.
난 진심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든 무조건 통하는 거라고 생각했고, 만약 통하지 않는다면 그건 상대방이 진심이 아니기 때문이라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런 사고방식은 틀렸다고, 전면으로 부정당했다.
사람과 사람이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 그것이 의도대로 받아들여지기 위해 필요한 요소의 중요성을 따져 보면 말의 내용이 차지하는 비율은 겨우 7%라고 한다. 나머지 93%는 말투나 외모, 표정과 같은 '겉으로 보이는' 것들이라고.
난 이 대목에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면 내용이 풍부하지 않고 거기에 진심이 담겨 있지 않더라도 93%로 화려하게 꾸미면 커뮤니케이션이 성공하고 인간관계가 원만해진다는 얘길까?

옳은 가치에 대한 정의 및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혐오로 인해 사실 어제부터 조금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정체성이나 가치관의 위기는 대개 다급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공감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 그래서 남들에게 금방 공감을 얻지도, 쉽사리 이해를 받지도 못한다.

그래도 다행이다.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내 말을 들어 주는 일기장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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