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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생각상자

세탁소

by 일본맛탕 2008. 11. 14.
세탁소에 옷 몇 개를 드라이를 맡겼다.
언제 맡겼나 기억도 안 나는데 아마 늦은 겨울이나 초봄쯤이었나 보다.
맡겼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더위가 조금씩 가시는 늦여름쯤에야 생각이 났다.

근데 내가 무슨 옷을 맡겼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솔직한 나는 세탁소에 가서 "제가 옷을 맡기긴 맡겼는데 무슨 옷을 맡겼는지 기억이 안 나요."라고 그대로 말했더니 아저씨가 그럼 어떻게 찾아갈 거냐며 ㅡ_ㅡ;
겨울 잠바가 없는 것도 같아서 잠바랑 코트를 맡긴 것 같다고 했다. 근데 아무리 찾아도 없길래 아저씨가 지금은 어두워서 잘 못 찾겠으니(세탁소엘 밤에 가서) 낮에 전화해 주면 찾아 놓겠다 하셨다. 그래서 전화번호를 받고 집으로 갔다. 어두운데 힘들게 옷더미를 뒤지신 아저씨께 죄송했다.

근데 집에 가 보니... 웬걸... 없을 줄 알았던 잠바랑 코트는 떡하니 장롱 안에 걸려 있다.
내가 뭘 맡겼나 도저히 생각이 안 나서 또 멍하니 며칠을 보냈다. 그리고 가을 옷을 정리하면서 내가 맡긴 게 겨울 바지랑 치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맡긴 건 알았다.
하지만 난 쉽사리 세탁소로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1. 세탁물을 늦게 찾아서 아저씨한테 죄송해서
2. 며칠 전에 괜히 잠바 찾으러 왔다고 해서 아저씨한테 죄송해서
3. 낮에 전화하겠다고 해 놓고 안 해서 아저씨한테 죄송해서
4. 다시 찾으러 온다고 해 놓고 안 가서 아저씨한테 죄송해서
5. 아저씨가 평소에 우리 집 택배도 잘 받아주시는데 괜히 아저씨한테 죄송해서
6. 그냥 막연하게 아저씨한테 죄송해서 -_-

그냥 무작정 6번이다.. 닥치고 아저씨 죄송이다...ㅜ.ㅜ

그래서 언제 찾으러 가야 하나 망설이고만 있다가 드디어 어제 심호흡을 하고 세탁소 문을 열었다!!!!
(이제 너무 추워서 겨울 바지가 필요하겠더라고...ㅜ.ㅜ)

"아...아저씨 저....저기요.... 제가 오...오래 전에 바....바지를 마...맡겼는데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얘기하자 아저씨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옷 속에서 쓱싹쓱싹 내 옷을 찾아 주신다. 찾으러 올 걸 알고 일부러 잘 보이는 곳에다 걸어 놓으신 모양이다.
그리고 태연하게 옷을 주시며 말씀하신다. "만 이천원이요~ 감사합니다~"
심장을 쓸어내리며 한마디 한마디를 꺼낸 내가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네! 감사합니다!!! ^0^" 하고 대답하고는 옷을 가지고 세탁소 문을 나섰다.

사실 상대방은 중요하게 생각지도 않는데
나 혼자 마음 졸이고, 나 혼자 걱정하고, 나 혼자 미안해하고, 나 혼자 끙끙대는 일이 참 많은 것 같다.
정작 상대방은 훌훌 털어버렸는데. 전혀 신경도 안 쓰고 있는데.

나도 조금만 대범해져야겠다. 헷헷!!
(아니 그렇다고 또 옷 맡기고 몇 달 뒤에 찾아 가겠다는 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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